현대제철, 미국 내 생산 거점 확보 검토
전문가 "美 수요 흡수 위해선 진출 필요"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도 같은 맥락
한국과 일본의 주요 철강사들이 미국 현지 진출에 적극 나서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출범으로 인해 강화되는 보호무역주의에 대응하는 한편, 주요 시장인 미국발 수요를 흡수하기 위해서다. 현지 내 생산거점을 구축해야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으로 풀이된다.
8일 업계에 따르면 현대제철은 미국 현지에 자동차용 강판을 생산하는 전기로(제철소) 건설을 검토 중이다. 루이지애나·텍사스· 조지아 등 남부 지역 주(州) 정부와 투자 관련 논의를 진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제철은 일찍이 해외 신규 생산 거점 준비를 구상하고 있었다. 글로벌 보호무역주의가 점차 강화하고 있어 이를 대응하기 위해 이전부터 여러 지역을 검토하고 있었다는 게 회사 측의 설명이다.
서강현 현대제철 사장은 지난해 4월 정기주주총회에서 "글로벌 보호무역주의에 대응하기 위해 현지 생산거점도 검토하고 있으며, 어떤 지역에 투자해 무역 장벽을 극복할 수 있을지 세밀한 검토를 해 나갈 예정"이라고 밝힌 바도 있다.
현대제철의 이번 계획이 실현되면 '두마리 토끼'를 모두 잡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우선 그룹사를 비롯, 글로벌 완성차 업계의 수요에 대응하는 동시에 미 정부의 관세 정책에도 유연하게 대처할 수 있게 된다.
현재 현대차그룹은 조지아주 기아차 공장, 앨라배마주 현대차 공장에서 각각 연 35만대, 연 33만대를 생산한다. 조지아주 서배너 지역에 완공 직전인 현대차그룹 메타플랜트아메리카(HMGMA) 전기차 공장(연 30만~50만대)의 생산량을 더하면 연간 최소 100만대의 차량을 생산하게 된다.
차량 한대당 1t 가량의 강판이 필요하다는 점을 고려하면 현지 제철소의 수요는 상당한 수준으로 예상된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미국시장에서 총 170만8000대를 넘게 판매하면서, 역대 최대 판매기록을 갈아치웠다. 현대제철의 든든한 수요가 존재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업계는 현대제철이 해당 제철소의 생산역량을 통해 새로운 고객 확보에도 집중할 것으로 분석한다. 제너럴모터스(GM), 포드와 같은 완성차 업체에 자동차용 강판을 판매할 가능성이 크다. 실제로 현대제철은 자동차용 강판 연 생산량의 17%를 현대차·기아 외 해외 완성차업체에 팔고 있는데, 이 비중을 40%까지 높여 계열사 의존도를 낮춰 '차량용 강판 글로벌 톱3'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고 있다.
특히 지난해 9월 GM과 포괄적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바 있어 이같은 분석에 힘이 실리고 있다. 당시 현대차그룹과 GM은 내연기관차부터 전기차, 하이브리드차량, 수소차 등 전 파워트레인 분야에 있어 기술개발 및 생산협력을 약속했다. 자동차용 강판 및 자동차 주요 부품 등에 통합 발주 체제를 구축, 원가절감에 공동 대처하기로 하는 내용도 포함된 바 있다.
물론 이를 위해 뒤따르는 과제도 있다. 전기로에서 생산되는 쇳물은 고철을 원료로 할 경우 고로에서 나온 쇳물보다 물성이 떨어져 자동차용 강판으로는 적절하지 못한 한계가 있다. 현대제철은 직접환원제철(DRI)을 통해 얻어낸 순수한 철을 전기로에 넣어 보강할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위한 DRI 설비도 준비가 필요하다.
점차 강화되고 있는 글로벌 보호무역주의 대응에도 효과적일 것으로 보인다. 현재 국내 철강업계는 미국 정부의 쿼터제 적용으로 대미 철강 수출이 제한적인 상황에서 트럼프 정부의 출범이 더해져 쿼터 축소 및 관세 부과가 더 강화될 것을 우려하고 있다.
서 사장은 신년사에서도 이에 대한 대응책 마련이 필요하다고 강조한 바 있다. 그는 "무역 블록화 및 공급망 규제에 대응할 수 있는 글로벌 사업 거점을 확보해야 한다"며 "수출 경쟁력 강화와 현지 판매체제 구축이 필수적인 과제로 부각됐다"고 밝혔다.
일본제철이 미국 철강기업 US스틸 인수를 시도한 것 역시 현대제철의 미 본토 진출과 같은 맥락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일본제철의 US스틸의 인수는 최근 조 바이든 대통령의 불허 결정으로 좌초 위기에 놓여있다.
업계에선 일본제철이 강점을 가진 전기차 모터의 필수 철강 제품인 무방향성 전자강판의 생산 설비를 최근 가동 시킨 US스틸과 협력해 미국 자동차업체에 대한 판매량 증가를 꾀하려 했던 것으로 풀이한다.
일본제철의 US스틸 인수 의지는 상당히 강하다. 무토 요지 일본 경제산업상은 바이든 대통령의 불허 결정에 "일본과 미국 재계, 특히 일본 업계에서 양국 간의 미래 투자에 대한 강한 우려가 있고 일본 정부는 이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에 더해 일본제철은 미 정부 심사 무효화를 요구하는 불복 소송을 미 워싱턴DC항소법원에 제기했다.
이재윤 산업연구원 소재산업환경실장은 "최근 철강업계의 경영환경을 보면 해외 생산 거점을 준비하는 게 유리한 상황으로 흘러가고 있다"면서 "친환경 철강 생산도 준비해야 하는 상황에서 통상 환경도 거세지고 있어 전통적인 생산 강국들은 새로운 거점 확보에 집중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미국의 철강 수요가 전세계 2~3위 정도 되는데 자체적인 공급역량은 한참 부족하다"면서 "몇년 전부터 미국이 유망한 시장으로 평가되는 만큼 현대제철 역시 검토하고 추진하는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