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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나간 노무현의 면목을 찾습니다


입력 2009.05.01 09:28 수정        

<칼럼>노무현 검찰행 버스의 슬픔과 4․29 참패 숨은 교훈

권력의 부패바퀴가 던지는 궤멸과 추락의 명령 체계 명심

"권력은 국민을 위해 있어야 한다." 이 지극히 당연한 말은 브이 포 벤데타(V For Vendetta, 2005)라는 영화 초반부에 나오는 말이다. 지금 우리가 진정 우려하는 것은 금융기관이나 기업파산이 아니라, 유동성 위기나 신용위기를 넘어 총체적인 신뢰의 위기와 권력의 부정부패 나락에 추락하는 것이다.

그러면 자기확신적 포기에 빠져 국가사회는 물론 개인적 인생까지도 버리게 된다. 글로벌 금융난국으로 민생경제의 주저앉음, SI(멕시코 인플렌자)로 ‘팬데믹(Pandemic) Phase 6’ 직전까지의 공포 분위기, ‘불신-부패-부정‘, ’무책임-무능력-무원칙, ‘허영-허세-허욕’ 등 ‘ㅂ’, ‘ㅁ’, ‘ㅎ’ 돌림병의 난무, ‘저성과-저성장-저의욕’의 ‘ㅈ’자 걸림돌의 절망 앞에 또 전직 대통령 한 사람이 부정부패 혐의로 검찰에 소환되었다.

국민들은 보고 싶지 않은 광경을 통곡하고 싶은 심정으로 또 목격해야 했다. 어쩌면 차라리 13년 6개월 전, 전두환 전 대통령의 골목대장이 더 좋았다. 하던 대로 자가용을 타지 버스는 또 뭔가! 노란 돼지 저금통의 낚시질 이미지가 연상되었다. 도덕성으로 무장한 개혁 이미지의 몰락, 글로벌 경제난국 후폭풍에 휩싸인 민생의 절망이 교묘하게 교차되어 대한민국의 서글픈 통곡 소리가 전국에 울러 퍼졌다.

“면목이 없습니다. 잘 다녀오겠습니다.”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는 시대,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자가 득세하는 굴절된 풍토는 이제 끝나야 하고, 반드시 청산되어야 합니다.” 꼭 6년 시간의 간격이 남긴 노무현 전 대통령의 이중적 안타까움이다.

면목(面目)은 사람이나 사물의 겉모습을 말한다. 그러면 속모습은 따로 있다는 말인가? 얼마를 먹으려고 그는 스스로 원칙을 무너뜨리고 신뢰사회를 걷어찼을까? 기어이 정정당당하게 노력하는 서민을 통곡하게 만들어야 했나? 성공하는 사회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칙과 특권이 용납되어야 한다는 것을 왜 그렇게 자세하게 보였을까? 정직하고 성실한 대다수 민생의 가슴에 꼭 ‘대못질’을 해야 시원했을까?

생존에 찌든 민생의 가슴에 꼭 ‘대못질’ 해야 했나

역사는 항상 권력의 무덤을 스스로 파는 사람들을 숨기지 않고 진실과 정의 앞에 밝히고 만다. 아둔한 인간들이 스스로를 영웅으로 착각하고 그 나락의 수렁텅이에 기꺼이 빠져든 든 얘기를 처연하게 들려준다. 이것이 시간의 흔적인 역사이자 ‘시간의 보복’의 출발이다. 그래서 항상 역사의 교훈은 예지력와 통찰력을 남기려고 애쓴다.

어쩌면 권력이란 인간 삶 전체를 놓고 보면 날카로운 비수가 분명하지만, 안타까운 수많은 민초(民草)들을 끊임없이 밟고 고통의 질곡으로 내몬 피의 대가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권력은 서글픔과 질곡을 전제하고 있다.

질곡(桎梏)이란 죄수를 가두어 둘 때 쓰던 형구(刑具)인 두 개의 기다란 나무토막을 맞대어 그 사이에 구멍을 파서 죄인의 두 발목을 넣고 자물쇠를 채우는 차꼬와 수갑을 함께 이르는 말이다. 즉, 몹시 속박하여 자유를 가질 수 없는 고통의 상태를 비유적으로 시사한다.

그래서 질곡은 반드시 가해와 피해, 비통과 참혹, 갈등과 분단, 풀뿌리 민초들의 수탈, 역사 인식, 아픔, 환멸과 환난, 암울과 궁핍, 전쟁과 정쟁, 이전투구, 불화와 다툼, 구속과 삶의 끈질김, 자아 상실, 해원(解寃), 역사적 진실, 영원한 생명과 존재의 본질, 통찰과 예지, 통한과 수난, 위기와 굴곡 등의 도전과 응전에 따른 ‘시간의 보복’과 연계된다.

국민은 권력자의 올곧은 강렬한 카리스마 원해

해방 후 지금까지 청와대 질곡의 역사가 이를 반증하고 있다. 권력은 국민이 잠시 위정자에게 양여한 헛물이다. 이는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통치권력은 국민 소유의 천부적․헌법적 권리를 보상(補償) 없이 일시적으로 대통령에게 위탁한 것에 불과하다.

때문에 권력자는 자연적으로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보전하기 위해서 국민과 함께 써야 하고, 자신 한 몸의 이익을 위해 천하를 고생시키거나, 실망시키는 일을 절대 하지 않겠다는 맹약을 해야 한다.

그러나 권력의 속성은 항상 부정부패의 유혹과 함정 가까이에 있다. 권력은 ‘그들만의 잔치‘라는 오만의 배타적 이기주의로 타락한 돈과 안타까운 명예가 제일이라는 저속한 야합에 물드는 것에 주저함이 없다. 그래서 참다운 권력자는 익숙해진 짜릿한 자극감이나 한방을 덧내는 쾌감, 그리고 일시에 몰입시킬 수 있는 선전선동의 레토릭(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헛구호)에 빠지는 것을 가장 먼저 경계한다.

오만의 배타적 이기주의로 타락한 돈에 젖어

역사를 통하여 위대한 지도자 밑에는 위대한 국민이 있다. 역사적으로 전직 국가수반 등 수많은 국가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조국 뿐 아니라 지구촌 전반에 커다란 감화와 실용적 가치를 선제해 왔다.

그들은 국정최고책임자 자리를 물러나 조용히 역사의 평가와 심판을 기다리면서, 인권, 독재타도, 가난, 환경, 질병, 국제범죄, 대량학살무기 등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국민과 소통하고, 자신의 명예를 걸고 ‘더 좋은 삶, 더 나은 인권’ 등의 새로운 역사창조에 매진했다.

그런데 작금의 대한민국 전직대통령들은 어떤가? 분쟁 조정 해결사가 아니라 사회갈등 조장을 스스로 자처하고 나선다. 문제 해결에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기득권에 눌러 앉아 없는 문제를 도리어 만들고 있다.

성공한 전직 국가수반이 되려면 항상 겸손한 태도와 포용을 유지하고 국가 발전에 대한 비전을 가져야 한다. 인권과 인류 공동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전직 국가지도자라는 책임 아래 항구적인 국가와 민족의 번영을 위해 실천하는 자세와 겸손한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

그런데 작금의 전직대통령들은 정작 본인이 뭘 잘못했는지, 어떻게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잘 모른다. 그래서 국민들은 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알고나 있는지 궁금하다. 국민이야 어떻게 사는지는 아랑곳하지 않고 현직 대통령을 독재자까지로 물고 늘어지는 ‘야비한 근성’을 서슴지 않고 내뱉는다.

“나라를 잘 다스리려면 가장 시급한 일이 무엇이겠소?”, “대왕의 권위를 크게 세우시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춘추시대 초나라 장왕(莊王)과 손숙오(孫叔敖)의 문답이다. 명재상 손숙오는 임금의 권위가 뚜렷하지 못하면 안으로는 백성들이 믿음을 잃게 되고, 밖으로는 각국의 업신여김을 받게 될 것이라고 진언했다. 그러면서 권위를 잃는 지름길은 부정부패라고 단언했다.

지금으로부터 2600년 전의 역사적 교훈이 2009년 4월 말에 우리에게 던진 너무나 가치적인 시사점이다. 그동안 안으로 지난 대통령들은 국민들로 하여금 믿음을 잃게 만들었다. 밖으로는 지난 30년 동안 국민이 일군 대한민국의 웅비하는 이미지를 스스로 업신여김을 당하게 했다.

조국을 고질적인 가난으로부터 해방시킨 대통령은 저격당하고, 군정 대통령은 둘 다 부패로 영창에 들어갔다. 최초 문민대통령은 IMF로 국가를 도산시켰으며, 좌파정부 10년은 오락가락 국론분열과 김정일 독재의 배만 채워주다가 대다수 자유민주 국가의 비웃음을 사고 말았다. 그리고 지금 또 전직 대통령 하나가 검찰청사에 불려갔다.

전직 대통령 중에는 퇴임 후에 계속 현 정부를 비난하고, 국민들을 이간질시키며 사회갈등을 조장하기에 바빴다. 그러나 위대한 지도자 밑에는 위대한 국민이 있다는 것을 반증하듯이, 멀리는 조지 워싱턴 미국 초대 대통령, 인도 간디, 호치민 전 베트남민주공화국 주석, 가까이는 넬슨 만델라 전 남아프리카공화국 대통령, 강택민 전 중국 국가주석과 주룽지 전 총리,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 매리 로빈슨 전 아일랜드 대통령, 리콴유 전 싱가포르 수상, 나카소네 전 일본 수상 등 많은 전직 국가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조국 뿐 아니라 지구촌 전반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들은 가난, 환경, 질병, 국제범죄, 대량학살무기 등에 대한 새로운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자신의 국가명예를 안고 ‘더 좋은 지구, 더 나은 인류’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왜 우리에게만 이런 훌륭한, 역사에 책임을 지는 전직 대통령은 없을까? 성공한 전직 국가수반이 되려면 항상 겸손한 태도와 포용을 유지하고 국가 발전에 대한 미래비전을 가져야 한다. 또한 인류 공동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전직 국가최고책임자라는 사명 아래 항구적인 국가와 민족의 번영을 위해 실천하는 자세와 겸손한 리더십을 가져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1일 새벽 강도높은 검찰 소환 조사를 마친 뒤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을 빠져나가고 있다.

국민이 일군 대한민국 이미지 스스로 업신여김 당하게

“정당의 목적은 정권의 획득에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정당의 존립목적을 이렇게 배웠다. 그런데 어떻게 정권을 획득할 것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수단과 방법은 배우지 못했다. 그리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정당의 목적은 ‘정당한 방법’으로 ‘올곧은 정권’을 획득하는데 있다.” 여기서 정당한 방법이란 네거티브 전략이나 마타도어(흑색선전)를 하지 않고 법과 윤리에 근거한 수단을 말한다.

이런 관점에서 지난 두 번의 대선에서 아쉽게 떨어진 이회창 자유선진당 총재는 두 번 연이어 ‘정당한 방법’이 아닌 것에 의해 대통령 자리를 강탈당했다. 이회창 후보는 두 아들의 병역면제 문제, 병풍(兵風)사건 주역인 김대업 네거티브 공세로 곤혹을 치렀다.

또한 설훈 전 의원도 이회창 후보의 20만 달러 수수설을 허위 유포해 노무현 전 대통령 당선의 일등공신으로 등장했다. 이런 관점에서 지금 현재 두 좌파정부가 ‘올곧은 정권’이었는지는 앞으로 역사가들이 판단할 심각한 문제다.

지난번 ‘이명박 정부’도 또 다시 ‘정당한 방법’이 아닌 마타도어(흑색선전)와 네거티브 비난공세의 선거 전략에 의해 건국 60년 제17대 대통령 권징(勸懲)을 사취당할 뻔 했다. 그것이 바로 “BBK 한 방에 보낼 수 있다.”는 그들의 좌파적 전략이었다.

우리가 변방의 역사에서 살아왔다고?

그들은 2003년 2월 25일 제16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외쳤다.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은 변방의 역사에서 살아왔다고 말했다. 때로는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하지 못하는 의존의 역사를 강요받았다고 했다. 그래서 이제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근본적으로 부정했다. 이처럼 제16대 대선은 2004년 4월 15일 제17대 총선과 더불어 대한민국의 주류(主流) 교체의 개혁 드라이브를 예고했다.

6․25 남침 후 50여 년 간 우리 사회의 이념적․정서적 주체세력임을 자부했던 전전(戰前)세대가 역사의 뒤안길로 떠나고 전후세대가 그 자리를 메웠다. 전전세대가 전쟁의 폐허 속에서 경제를 일으킨 산업화․경제개발 세대라면 전후 세대는 비교적 풍요로운 경제여건 속에서 권위주의 체제를 무너뜨리는 데 앞장선 민주화 세대였다. 50대이면서도 386정신을 가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승리는 급격한 권력이동을 예고한 상징적 사건이었다.

그러나 개혁과 보수, 좌파와 우파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사이에 두고 갈렸다. 호남과 보수적인 영남의 지역감정과는 달리 ‘친노-반노’라는 전선을 따라 심각한 갈등과 불신이 불거졌다.

그래서 386 전후세대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정치세력들은 지역주의와 3김(金)식 권위주의에 물들었던 정치판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지도 못했다. 오직 안티와 저항, 그리고 갈등의식으로 단련된 그들은 새로운 정치문화를 만들어 내지도 못했고, 사회통합과 갈등해소에도 기여하지 못했다.

노무현 정치 세력들의 본 모습

현명한 지도자는 사소한 문제를 중요한 문제로 만들지 않는다. 쉽게 약속하는 사람, 핑계 대는 사람, 오늘 일을 내일로 미루는 사람, 반대하기 좋아하는 사람, 자기이익만 챙기려는 사람, 냉소적인 사람, 뒷공론을 잘하는 사람, 스스로를 전문가인 척 하는 사람, 둔감한 사람, 중요한 때마다 농담으로 얼버무리는 사람들은 사소한 문제에 집착하게 된다. 이러한 원인은 바로 오만하기 때문이다.

한편 성공한 정치지도자의 가치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최고 권력자의 지위에 오르고 난 이후에도, 밑바닥의 아픔에 대하여 언제나 깊이 마음을 쏟는다는 점이다.

이것은 성공한 정치지도자가 민생들의 아우성과 호소에 귀와 눈이 멀지 않았다는 점을 반증하고 있다. 권력을 잡기 전에는 그랬던 사람들도 권력을 잡고 나면 밑바닥의 아픔에 대하여 귀와 눈멀기 쉽다.

그러나 성공한 정치지도자는 그렇지 않다. 그것이 자신을 계속하여 훌륭한 지도자로 만들어가는 힘이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오만한 승리자의 비참한 최후 또한 잘 알고 교훈적으로 잘 알고 있다.

오만한 승리자의 비참한 최후를 알아야

그러면 우리의 전직대통령들은 어떠한가? 모두가 집권 전에는 어려운 현실에 처한 호소할 데 없는 민생의 형편에 귀를 기울이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지도자가 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퇴임이 가까워 오면 그런 자세를 보기가 날이 갈수록 어려워졌다. 권력자가 사회의 밑바닥이 겪고 있는 아픔을 외면하는 순간, 정치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정략이 되고 마는 것을 우리는 계속 보아왔다. 따라서 민생들의 고난과 눈물에 마음을 기울이는 권력이 될 때, 그 권력을 감당하는 지도자는 위대해질 수 있는 것이다.

우리 대통령들의 현실은 대부분 집권이 시작되면 권력의 오만에 도취해버렸다. 한국사회 밑바닥의 생생한 아우성과 억울해하는 호소에 둔감해져가는, 아니 그로 인한 쓴 소리를 듣기 싫어하는 권위주의적인 존재가 되고 말았다.

대통령이 된 이후 민생들의 삶의 현장을 방문하고, 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면서 하나의 마음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을 많이 보지 못했다. 그들의 정치현장은 날이 갈수록 서민들의 고난에서 멀어졌다. 그렇게 별 수 없이 ‘인(人)의 장막’에 둘러싸이게 되었고, 판단력은 시간이 지날수록 흐려졌다.

그래서 오늘날 대한민국 정치의 난맥상은 고난에 처한 민생들의 삶과 깊숙이 맞닿아 있지 못한 대통령들의 자세에 상당부분 책임이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만델라의 퇴진같이 성공한 정치지도자들이 보여준 감격이 또한 자신의 것이 되고자 원했다면, 한국의 대통령들은 가난한 자들의 고난을 향해 발길을 돌려야 했었다.

이런 관점에서 이제라도 노무현 집단은 엄정한 역사의 수레바퀴가 던지는 궤멸과 추락의 명령체계를 깨달아야 한다. 아직은 부정부패를 절대 용서하지 않는 정의의 칼날이 날카롭다는 것을 이번에 깨닫고 스스로의 냄새난 짓에 통곡해야 한다.

반면에 ‘이명박 정부’의 권력자들은 임기 내내 겸손하게 민생들의 고난과 눈물에 마음을 기울이는 권력이 될 때, 그 권력을 감당하는 지도자는 위대해 질 수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검찰 행 버스의 착잡함이 던지는 ‘시간의 보복’을 보면서, 우리 국민들은 이명박 대통령 스스로 자신의 미래가 바로 ´반부패 자기혁신´에 있다는 것을 또 다시 가슴에 새기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한다.

2013년 2월 24일 때가 이르러 아름답게 퇴진하는 대통령의 모습에 감격하고, 이명박 대통령의 5년 재임 중에 그가 바친 국가적 헌신에 감사의 마음으로 환호하는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움을 소박한 민생들은 느끼고 싶은 것이다. 어쩌면 4․29 재보선 참패의 교훈도 여기에 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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