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광래 선임-해임까지 ‘부끄러운 자화상’
절차 무시한 축구협회..명분 없는 경질 ‘황당’
감독 선임·해임 과정 ‘원칙·비전’ 사라진 지 오래
결국 조광래 감독이 경질됐다.
축구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뒤 불과 1년 5개월만의 일이다. 그간 대표팀을 이끌고 보여준 성적이나 리더십에 부정적인 평가가 적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3차 예선을 불과 한 경기 남겨둔 상황에서 조 1위를 달리고 있는 감독에게 강제로 지휘봉을 뺏기에는 명분이 부족했다.
무엇보다 동네 조기축구회장도 아닌, 일국의 국가대표팀 감독의 운명을 결정하면서 절차와 원칙을 무시한 채 축구협회 몇몇 고위층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이루어진 해임은 축구계와 팬들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했다.
조광래 감독의 해임은 결코 개인의 문제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축구협회는 이번 사태를 통해 축구대표팀 감독이 언제든 협회의 비위를 거스르거나 만족할 만한 성과를 내지 못하면 제대로 된 절차나 계약기간에 대한 보장도 없이 하루아침에 쫓겨날 수 있는 자리라는 것을 스스로 보여준 꼴이 되고 말았다. 과연 누가 이런 자리를 위해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과감히 도전하려 들 것인가.
사실 비극의 시작은 지난해 7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축구협회는 '2010 남아공월드컵'에서 사상 첫 원정 16강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이후 그 성과에 도취, 차기에 대한 준비가 전혀 돼 있지 않았다. 협회가 진정 비전이 있는 조직이었다면 월드컵이 끝난 이후 허정무 감독의 거취에 대해 미리 논의를 해뒀어야 했다.
월드컵과 지난 3년간의 성과를 감안한다면 허정무 감독이 연임을 하더라도 충분한 명분을 얻을 수 있었고, 월드컵 직후 6개월 앞으로 다가왔던 아시안컵을 대비한 혼란도 줄일 수 있었다.
보통 월드컵 직후 대표팀 감독들이 사임하던 관례를 벗어나 대한민국에서도 3~4년 이상 장수하는 사령탑이 국내 지도자를 통해 나올 수 있다는 전례도 세울 수 있었다. 허정무 감독이 다시 지휘봉을 잡지 않는다면 미리 그에 따라 차기 감독의 후보군을 선정하고 선임 조건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세워뒀어야 했다.
그러나 협회는 어느 쪽도 하지 않았다. 협회는 월드컵이 끝난 직후에야 허정무 감독에게 연임의사를 소극적으로 타진하는 수준에 그쳤다. 그러나 월드컵 16강에도 불구하고 자신에 대한 호의적의지 않은 평가에 부담을 느낀 허정무 감독은 이미 대표팀 감독직 고사를 결심한 뒤였다. 허정무 감독 외에 별다른 대안을 준비해놓지 않았던 축구협회는 코앞으로 다가온 아시안컵을 앞두고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부랴부랴 새로운 사령탑을 찾느라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냉정히 말해 그것도 축구협회가 처음부터 명확한 기준과 비전을 세우고 새로운 감독을 찾은 것이 아니라, 국내에서 조금 괜찮은 경력을 세운 지도자들을 골라 의중을 떠보는 수준에 불과했다. 이웃나라인 일본이 남아공월드컵에서 16강을 달성한 뒤 오카다 감독이 명예롭게 퇴진하고 곧바로 이탈리아 출신의 알베르토 자케로니 감독을 선임하며 신속하게 새로운 체제로 전환한 것도 대조를 이루는 행보였다.
한국축구협회는 그저 허정무 감독이 월드컵에서 모처럼 성과를 올렸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국내 감독도 충분히 대표팀에서 성적을 올릴 수 있다는 근거를 내세웠을 뿐이다. 어떤 감독이 대표팀에 필요한 감독이, 어떤 축구가 목표인지에 대한 목적의식은 처음부터 없었다.
그나마 아무도 맡지 않으려는 독배에 과감히 손을 들고 도전장을 던진 유일한 인물이 바로 조광래였다. 조광래 감독은 지난해 허정무 감독 사임이후 유일하게 적극적으로 대표팀 감독에 대한 의지를 드러낸 인물이었다. 최강희 감독이나 홍명보 감독 등도 후보군에 올랐지만 모두 고사했다.
사실 축구협회가 조광래 감독을 선임한 것은, 처음부터 명예로운 추대가 아니라 하겠다고 나서는 이도 없고 달리 마땅한 사람도 없으니 마지못해 지휘봉을 넘긴 모양새였다. 처음부터 축구계에서 비주류 인사로 평가받던 조광래 감독은 처음부터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지 못했을까. 아마 어느 정도는 짐작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조광래 감독은 자신의 평생의 꿈인 국가대표팀 감독과 한국축구의 비전을 위해 위험부담을 안고 승부수를 띄웠다. 우려했던 대로 대표팀 운영을 둘러싸고 조광래 감독도 축구협회는 고비마다 대립각을 세웠고, 이는 위기상황이 닥쳐왔을 때 조광래 감독이 협회의 보호와 지원을 받지 못하고 고립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조광래 감독이 지난 1년 5개월간 보여준 시행착오를 굳이 미화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런 사태를 초래한데는 분명히 조광래 감독 스스로의 책임도 크다. 그러나 적어도 국가대표팀 감독이라면 떠나는 순간이라도 이보다는 좀 더 품위 있는 예우를 받을 자격이 있었다. 협회는 절차에 어긋나게 대표팀 감독을 몰아내고도 ‘특수상황’이라는 이유도 모든 부당함을 합리화시켜버렸다.
축구협회는 조광래 감독의 경질로 어쨌든 대표팀이 지난 1년 5개월간 쌓아온 모든 성과와 노하우를 부정하고 원점에서 다시 출발하는 길을 택했다. 조광래 감독은 어쨌든 경질을 통해 최종적으로 그의 축구를 평가받을 마지막 기회마저 박탈당하며 동정론을 얻었지만, 이제 다가온 쿠웨이트전과 앞으로의 대표팀 운영에 대한 혼란은 온전히 축구협회의 책임으로 넘어왔다.
당장 대표팀 차기 감독선임 문제부터 시급하다. 지난해와 조광래 감독을 선임할 때와 마찬가지로 협회는 아무 대안도 없는 상황에서 조광래 감독을 해임했다. 축구계나 팬들은 만일 조광래 감독을 경질시키면서 단순히 이런저런 핑계로 그보다 경력이나 실적에서 나을 것이 없다고 평가받는 인물을 데려온다면 결코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2004년 쿠엘류를 해임하고 본프레레를 선임하면서 한국축구가 더 큰 시행착오를 겪어야했던 악몽을 되풀이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후보군에 오른 감독들의 입장에서도 고위층과 스폰서라는 보이지 않는 압력에 좌우되는 대표팀 감독직이라는 독배를 과연 누가 들이켜야 할지 망설일 수밖에 없다. 누구를 탓할 것도 없이 모두 축구협회가 자초한 일이다.[데일리안 스포츠 = 이준목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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