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카카오톡
블로그
페이스북
X
주소복사

골방속 학생들 안녕들 하십니까


입력 2013.12.16 18:02 수정 2013.12.17 14:39        데스크 (desk@dailian.co.kr)

<칼럼>2010년 김예슬 대자보엔 자기성찰이라도 있었다

실천지성과 선동의 차이는 '대중의 분노를 자극하느냐'

16일 광주 북구 일곡동의 한 사거리 인근 전봇대에 '안녕들 하십니까?'라는 제목의 글이 붙어 있다. 평범한 고2라고 자신을 소개한 글쓴이는 철도파업, 의료민영화 등 현안에 대한 의견을 적고 시민들의 관심을 호소했다. ⓒ연합뉴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역사는 반복된다. 어떤 오류가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인류가 발전하고 있다고 단언할 수 있을까.

지식인의 오만과 오류는 대중의 무지를 타고 흐른다. 그러나 그것은 옳고 그름의 단계를 넘어 대중을 옭아맨 선동으로 이어지고 무기력과 분노로 응집된 대규모 군중심리를 만든다.

대립과 파괴, 피의 역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지식인의 입은 그래서 더욱 깊이 있는 성찰과 겸손으로 무장해야 한다.

강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주 27살의 고려대학교 학생이 약 두 장의 대자보를 학교 선전게시판에 부착했다. 궁금했다. 어떤 내용으로 이 사회를 향한 장탄식을 내보고 있는지.

안녕들하십니까? 라는 친근한 인사말로 제목을 정한 대자보는 철도노조파업, 부정선거논란, 밀양송전탑 문제를 지나 비정규직에 대한 짧은 소회를 지나 88만원 세대의 비애로 끝을 맺는다.

차라리 읽지 말 것을. 후회가 밀려왔다. 칼럼 한편 분량도 되지 않는 단문에는 치기어린 관점과 조악한 정치현안 분석이 담겨있을 뿐이었다. 차라리 하나의 주제를 선정해 심층 분석을 하는 것이 어땠을까? 미안하게도 그건 그냥 추운 겨울에 할 일 없는 청춘이 흘리는 말장난 같은 것들이었다.

광장에서 자유롭게 말할 자유는 민주시민의 권리다. 비록 그것이 순진한 자기위안이라 할지라도. 그 대자보에서 건질만 한 것은 ‘안녕들 하십니까?’ 라는 시적 수사뿐이었다. 그렇게 해서는 그대가 그렇게 증오하는 어른들의 생각을 바꾸지 못할 것이다.

이 정도 치기어린 27살짜리 지식인의 지적 오만에 대중은 얼마나 부합할 수 있을까. 그래도 지금은 2013년이다.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큰 오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가를 중심으로 ‘안녕들하십니까?’ 로 시작되는 대자보가 내걸리기 시작했다. 미디어는 이를 집중보도하고, 이는 다시 공중에서 뻥튀기되며 전국으로 확산됐다. SNS, 인터넷 포털이 덩달아 춤을 췄다. 대한민국 국민은 미처 생각지도 못한 찰나 안녕하지 못한 시대의 초라한 민초로 겨울 추위를 맞이했다.

그러나 그 안녕을 걱정해야 하는 민초들의 삶이 조금은 우습지 않은가. 27살 청년은 직위해제를 해고의 단계로 호도했지만 대중은 그저 말로만 철도공무원들을 동정하기 시작했다. 따듯한 전열기 앞에서 시국을 운운하고 정치를 논하며 어설픈 문장과 수사를 흉내 내며 대자보를 걸고, 인터넷 게시판에 이놈의 한국사회를 씹어내기 바쁘지만 대한민국의 전력수급 상황과 에너지 낭비문제는 눈꼽 만큼도 관심 없다.

처음 대자보를 내건 고려대 학생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 관심 없다. 그가 공부를 좀 하고 대자보를 썼어야 했다는 지적 또한 피곤할 뿐이다. 그건 해당 학교의 교육자들이 통탄해야 할 일이다. 경제학도가 직위해제의 개념도 정확히 모른다니. 이건 정말 끝까지 간 셈이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그의 말놀음에 마른가지에 붙은 불처럼 타오르는 군중들의 ‘따라하기’ 정신이다. 그대로 베껴 쓰다 못해, 개인적 신세한탄을 담은 ‘잡문’들을 우리는 건전한 지성인의 목소리라 칭송하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 가다간 정말 대한민국의 ‘안녕’을 걱정해야 할 때가 오지 싶다.

‘안녕들 하십니까’ 대자보 소동은 이미 여러 차례 벌어졌던 패턴의 여론 선전선동 수법이다. 시간을 멀리 되돌릴 것도 없이 2010년 겨울, 같은 경영학과 출신 선배인 김예슬 씨는 대학 거부 선언문을 내걸었다.

한마디로 학교 다니기 싫다는 투정을 부린 셈 인데, 그 제목이 ‘오늘 나는 대학을 그만둔다, 아니 거부한다’ 라는 멋진 문구였다. 당시에도 대학가를 중심으로 비슷한 대자보가 우후죽순 등장했었다. 그것들의 제목 역시 앞서 내건 자의 수사를 그대로 답습하거나 오마주한 것들이었다. 당시 김예슬 씨의 대자보는 문장으로 보나 글의 구성으로 보나 감동을 주는 측면이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이다.

“나는 대학과 기업과 국가, 그들의 큰 탓을 묻는다. 그러나 동시에 내 작은 탓을 묻는다. 깊은 슬픔으로. ‘공부만 잘하면’모든 것을 용서받고 경쟁에서 이기는 능력 만을 키우며 나를 값비싼 상품으로 가공해온 내가, 이 체제를 떠받치고 있었음을 고백할 수밖에 없다.”

선배만한 후배 없다지만, 김예슬 씨의 대자보 문구는 적게나마 자기성찰과 반성이라는 지식인의 기본 소명을 담고 있다.

2013년 똑같은 학과 후배가 쓴 “우리는 정치와 경제에 무관심 한 것도, 모르는 것도 아닙니다. 단지 단 한번이라도 그것들에 대해 스스로 고민하고 목소리내길 종용받지도 허락받지도 않았기에 그렇게 살아도 별 탈 없으리라 믿어온 것뿐입니다”와 같은 조악한 문장은 적어대지 않았다. 지적 퇴보인지, 지적 일탈인지 답답하기만 하다. 2010년 김예슬 씨의 경우보다 더욱 열광해대는 대중은 이성적 사고의 벼랑 끝에서 무엇들을 하시는지.

시간을 더 되돌려 보자. 세치 혀와 조악한 문장으로 독일과 유럽을 화마로 몰아갔던 요제프 괴벨스. 괴벨스는 1921년 문학평론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문학도였다. 글을 매우 잘 다룰 줄 아는 지식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거짓을 진실로 교묘하게 치장하는데 능한 지식이었다. 1929년 까지 문학적 커리어를 인정받지 못했던 그는 사회주의로의 심취, 히틀러와의 만남을 통해 선전가로서 재능을 발견하면서 파국으로 치달았다.

그는 1926년 ‘두 번째 혁명 그리고 히틀러’를 시작으로 선전가로 이름을 날렸다. 독일 국민은 그의 문장에 열광했고 히틀러를 찬양했다. 괴벨스식 선전의 특징은 지적인 분석을 배제한 감성적 문장으로 사회에 대한 냉소를 던지는 것이었다. 그는 모욕과 빈정거림의 달인이었으며 사회계층의 갈등을 부추기는 내용으로 가득했다. 일종의 대중의 분노를 자극하는 방식이었다.

‘안녕들하십니까?’ 라는 이름의 대자보가 가진 감성적 코드에 열광하는 대중과 괴벨스의 문장에 유혹당했던 독일인들의 차이점은 정확히 무엇일까? 인기몰이 하듯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밝히는 27살 고려대학교 경영학과 학생의 모습이 우리에게 과연 긍정적인 지식인의 모습일까? 대자보를 적어올린 동기를 묻는 한 기자의 질문에 그는 ‘분노’라고 대답했다. 이 수많은 민중의 분노를 제 몸으로 다 받아 안겠다는 것인지. 입맛대로 골라 쓰겠다는 것인지.

지식인의 소명은 자신의 앎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라, 성찰하고 겸손하여 스스로 감화되는 것이다. 대자보의 주인공과 그의 아류들은 얼마나 스스로에게 겸손하며 성찰하여 실천지성을 실현하고 있는지. ‘안녕들하십니까?’ 를 역시 변주해서 쓸 수밖에 없는 필자의 손이 저주스럽다.

‘대한민국의 청년 지식인들이여 골방에서 안녕들 하십니까?’

글/김방현 대학생 시사교양지 바이트 편집장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댓글 0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