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리어·마쵸킹 주마등…불멸의 '자진사퇴 매치'
1991년 WWE 레슬매니아7에서의 역사적 명승부 추억
세상에 없는 워리어와 마쵸킹이 남긴 차고 넘친 한판
싸움에는 이유가 있다. 스토리 없는 다툼은 없다.
1991년 미국 월드 프로레슬링 엔터테인먼트(이하 WWE) ‘레슬매니아7’에서 역사상 가장 흥미진진한 싸움이 펼쳐진다. 패자가 직장을 떠나는 룰, 이른바 얼티밋 워리어 vs 마초맨 랜디 세비지의 ‘자진 사퇴 매치’가 열렸다.
당시 마초맨은 ‘악역’ 마초킹으로 개명, 퀸 셰리(향년 49세 사망)를 매니저로 기용하고 WWE에서 악행을 일삼았다. 피해자 중 한 명이 바로 ‘세계 챔피언’ 얼티밋 워리어다.
마초킹은 워리어의 챔피언벨트를 몹시 탐냈다. 그래서 매니저 퀸셰리와 WWE 빈스 맥마흔 회장을 구슬려 그해 ‘로얄럼블’에서 워리어와 세계 타이틀전을 희망했다. 하지만 워리어가 단칼에 거절했다.
워리어는 “동네 건달을 상대할 시간이 없다. 그보다 이라크 사담 후세인 대통령을 지지한 서전 슬로터 엉덩이를 차줄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고 호통 쳤다. 당시 미국 연합군과 이라크는 실제로 ‘걸프전’을 치르고 있었다. 서전 슬로터는 WWE에서 ‘이라크 장교’ 배역을 맡아 워리어 및 헐크 호건과 대결구도를 형성했다.
자존심 상한 마초킹은 ‘워리어 vs 서전 슬로터’ 타이틀매치에 난입, 도전자 서전 슬로터의 폴승을 도왔다. 당시 마초킹은 심판 눈을 피해 ‘여왕봉’으로 워리어 머리를 후려쳤다. 얼마나 강하게 때렸는지 ‘퍽’ 소리가 장내에 울릴 정도였다. 워리어는 경기 후 인터뷰에서 “마초킹이 너무 ‘감정이입’한 것 같다. 머리가 으스러지는 줄 알았다. 큰 혹도 생겼다”고 토로한 바 있다.
이 사건으로 워리어는 ‘레슬매니아7’에서 마초킹에게 “지는 자가 WWE를 떠나야 한다”는 자진 사표 매치를 제안했다. 마초킹은 기다렸다는 듯 “야생동물 워리어여, 너의 도전을 받아주지. 이번 경기를 끝으로 쫓겨날 각오 하라”고 외쳤다.
워리어 vs 마초킹 혈투는 레슬매니아7 ‘준이벤트’로 치러졌음에도 메인이벤트(헐크 호건 vs 서전 슬로터)보다 내용이 알찼다.
초반부터 신경전이 불꽃 튀었다. 마초킹은 민첩한 동작과 현란한 기술, 치졸한 반칙, 꼼수 등을 총동원해 워리어를 괴롭혔다. 이에 맞선 워리어는 묵직한 해머링과 슬램계 기술로 마초킹의 빠른 발을 잡았다. 워리어는 베개 던지듯, 마초킹을 내동댕이쳤다.
극적인 장면의 연속이다. 자진 사퇴가 걸린 중압감 탓일까. 뿌리 깊은 악연 때문일까. 워리어는 마초킹을 파워슬램 하려다가 다시 세우고 ‘뺨’을 후려쳤다. 자존감 상한 마초킹은 링 밖으로 뛰쳐나가 ‘철재 의자’를 워리어에게 집어던졌다. 워리어가 링 안으로 들어온 철재의자를 잡는 순간 배후에서 마초킹이 워리어 후두부를 가격했다. 마초킹의 ‘잔꾀’였다.
이외에도 마초킹은 로프를 활용하거나 워리어 힘을 역이용했다. 둘은 혈전에 혈전을 거듭했고 ‘더블 크로스라인(이두박근으로 목을 휘감아 타격)’까지 주고받아 잠시 기절했다.
종반으로 접어들자 마초킹이 엘보우와 드롭킥, 바디슬램 등 잔매로 워리어를 쓰러뜨렸다. 또 링 밖 매니저 퀸 세리를 동원한 반칙공격으로 워리어를 그로기까지 몰고 갔다. 마초킹은 워리어를 기절시킨 후, 로프 3단 위에서 팔살기 플라잉 엘보우 드롭을 ‘무려 5번’ 작렬했다. 마초킹의 승리가 확실해보였다.
그러나 기적이 일어났다.
워리어는 폴 카운트 “원,투,쓰으..”에서 어깨를 들었다. 거짓말처럼 워리어의 폭주가 시작됐다. 입에 볼 풍선(?)을 문 채 발을 동동 구르고 링을 흔들기 시작했다. 마초킹이 워리어의 폭주를 제어하려했지만, 화만 돋울 뿐이다. 로프 반동 후 클로스라인 연속, 고릴라 프레스-스플래쉬(속칭 왕창 덮기) 콤비네이션이 작렬했다, 워리어의 역전승이 확실했다.
하지만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났다. 폴 카운트 “원,투,쓰으..”에서 마초킹이 무의식적으로 어깨를 들었다. 워리어도 놀랐다. 이제껏 고릴라 프레스-스플래쉬 맞고 일어난 레슬러는 없었기 때문이다.
‘인디언 후예’ 워리어는 자신의 손바닥을 보며 무언가 주문을 외웠다. 최후의 결전을 치르겠다는 각오였다. 마초킹 머리끄덩이를 잡고 세워 로프 반동 후 ‘3번의 플라잉 숄더 블록’을 작렬했다.
기절한 마초킹 가슴에 워리어는 살포시 한 발을 얹은 채 두 팔은 하늘로 향했다. 심판의 원, 투, 쓰리! 워리어 완벽한 폴승이다. 고동을 울리는 워리어 배경음악이 장내를 달궜고, 인디언의 후예는 격정적인 세리머니 뒤 떠났다.
홀로 링에 남은 '패자' 마초킹 앞에 나타난 것은 퀸 셰리였다. 마초킹 때문에 ‘동반 사표(실직)’ 쓰게 된 매니저 퀸 셰리는 화만 남았다. 그녀는 마초킹 복부를 5번 발길질했다. 그것도 모자라 가뜩이나 ‘탈모’인 마초킹 머리카락을 잡고 링 바닥에 내리꽂았다. 엎어진 마초킹은 정신을 잃었다.
그때 등장한 여인이 ‘마초킹 전 연인’ 엘리자베스(향년 42세 약물 과다복용 사망)다. 엘리자베스는 이성 잃은 퀸 셰리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링 밖으로 쫓아냈다. 그 뒤 링 안에 엎어져있던 마초킹에게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마초킹은 자신의 몸을 일으켜 세우려는 엘리자베스에게 거부반응을 보였다. 오히려 두 주먹을 불끈 쥐고 공격적인 자세까지 취했다. 워리어에게 너무 맞은 후유증 탓이다. 마초킹 눈엔 엘리자베스가 아닌, 퀸 셰리로 보였다.
서로 마주 본 상황에서 적막이 흘렀다. 엘리자베스가 눈물을 보이자, 마초킹은 그제야 정신이 돌아오기 시작했다. ‘희대의 악역’ 마초킹 아닌, 의리파 멋쟁이 ‘마초맨’으로 돌아온 것이다.
마초맨은 우는 엘리자베스를 태우고 특유의 자세로 관객의 환호에 답했다. 마초킹 아닌 마초맨의 귀환, 모든 관중이 자리에서 일어나 기립박수를 보냈다. 감동의 세리머니가 끝나자, 엘리자베스가 마초맨을 호위했다. 링 밖으로 나가려는 마초맨을 위해 링 사이를 열어젖힌 것. 그 순간, 마초맨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숙녀가 먼저~ 이제는 당신을 존중할 거야.” 마초맨은 자신의 ‘마초 기질’까지 버리고 링 줄을 젖혀 엘리자베스를 먼저 내려 보냈다. 그리고 대기실까지 엘리자베스를 호위했다. 장내는 격정의 울음바다가 됐다.
2014년, 워리어(향년 54세)와 마초킹(향년 58세)은 이제 세상에 없다. 그러나 “전사의 ‘영혼’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워리어의 말처럼, 두 프로레슬러가 보여준 ‘열정의 가치’는 불멸하다.그들이 링 안에서 쏟은 숱한 땀방울은 열정의 씨앗이다. 열정 없이 이루어진 결실은 없다. 팬들의 가슴에 열정을 심어준 워리어와 마초맨에게 감사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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