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 안성기 "아내도 '잘했다'고 칭찬했죠"(인터뷰)
임권택 감독 102번째 작품…오상무 역
"감정 절제 캐릭터, 쉽지 않았던 영화"
암에 걸려 죽어가는 아내를 4년째 수발 중인 50대 남성이 있다. 바쁜 회사 일을 마치고 나면 곧장 병원으로 가 아픈 아내를 간호해야 한다. 회사에서 받은 압박과 스트레스, 그리고 죽어가는 아내를 봐야 하는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지만 화를 내지도, 소리를 내지르지도 않는다. 자기 앞에 주어진 일들을 감정의 동요 없이 묵묵히 치러낸다. 너무 참아 안쓰러운 그가 젊은 여사원에게 끌린다. 영화는 묻는다. "이 남자를 비난할 수 있느냐"고.
9일 개봉한 '화장'은 영화계의 살아 있는 두 전설이 만난 작품이다. 임권택 감독과 배우 안성기. 안성기는 젊은 여자와 아내 사이에서 고뇌하는 오상무를 사실적으로 연기했다. 임 감독은 "오상무 역은 처음부터 안성기여야 했다"고 말했다. 영화 개봉날 서울 소격동의 한 카페에서 안성기를 만났다.
임 감독과 8번째 호흡…중년 남성 자화상 그려
'화장'은 소설가 김훈의 동명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했다. 얼굴을 곱게 꾸미는 '화장(化粧)'과 시체를 불에 살라 장사를 지내는 '화장(火葬)'이라는 중의적 의미를 통해 삶과 죽음의 두 얼굴을 묘사한다. 지난해 3월 촬영을 마쳐 1년 만에 극장에 걸렸다.
'화장'은 임 감독의 102번째 영화다. 안성기와 임 감독은 벌써 8번째 호흡이다. 이젠 눈빛만 봐도 통한다. "작품을 할 때마다 미지의 세계를 창조하시는 감독님이세요. 감독님이 버티고 계시는 것만 해도 후배들에게 본보기가 되죠."
안성기는 단편 소설을 많이 읽는다고 했다. 특히 이상문학상 전집은 따로 보관해둘 정도로 애착이 깊다. 2004년 이상문학상 대상작인 김훈의 '화장'도 그중 하나다.
"11년 전에 읽고 스크린에 옮기면 매력적인 영화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어요. 오상무와 나이도 비슷해서 공감했거든요. 김훈 작가의 글을 형상화하기 쉽지 않았는데 영화화해서 기쁩니다."
안성기는 젊은 여자를 탐하지만 간신히 버티는 오상무를 온몸으로 연기했다. 오랜 경력을 자랑하는 그조차 "연기하기 힘들었다"고 말할 만큼 오상무는 깊은 내면 연기가 필요한 캐릭터다. 안성기는 자신의 에너지를 오롯이 쏟아부었다.
"감정을 절제하는 게 힘들었어요. 뭐든 참아서 전립선 비대증까지 겪는 사람이죠. 일도 해야 하고 아픈 아내가 있다는 것도 인지해야 하는 오상무를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습니다. 영화가 무거운 분위기여서 기분이 가라앉기도 했고요. 지방 촬영에서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서 특히 그랬어요."
생의 마지막 종착지는 죽음이다. 영화는 생의 소멸에 대한 애잔한 정서를 사실적으로 보여준다. 안성기는 "죽음이라는 순간이 안 오면 좋겠지만 이는 숙명이자 거부할 수 없는 것"이라며 "인생에서 지나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느꼈다"고 했다.
극 중 오상무의 흔들림은 아내가 죽고 난 후 그리움으로 바뀐다. "사랑하는 아내에 대한 사랑을 나중에 느끼죠. 절절히 사랑했으면서 받아주지 못한 걸 굉장히 후회하는 거죠. 남편으로서 지켜야 했던 사랑에 공감했어요."
영화는 오상무가 젊은 여자를 보고 느끼는 '활활 타오르는 사랑'도 있지만, 남편으로서 아내의 곁을 지킬 수밖에 없는 '의무적인 사랑'도 있다고 말한다. 잉꼬부부로 소문난 안성기의 생각이 궁금해졌다.
"사랑이 끝까지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살다 보면 생기는 여러 힘든 일들이 사랑의 감정을 퇴색시키죠. 그러다 익숙해지고 식어버려요. 어렵게 만나서 사는데 따뜻하고 식지 않는 사랑을 하는 게 중요하죠. 잘 안돼서 문제지만...(웃음)"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으론 아내(김호정)를 씻겨 주는 목욕신과 추은주(김규리)와 손이 살짝 스치는 장면을 꼽았다. "목욕신은 인간의 처절한 아름다움을 생생하게 드러난 장면이자 영화에 큰 힘이 된 신이에요. 오상무와 추은주의 손이 마주칠 땐 묘한 감정을 느꼈어요. 짧은 순간에도 강렬한 기분이 들었죠."
추은주를 노려보는 장면에 대해선 "마치 먹잇감을 보는 노골적인 시선"이라고 웃은 뒤 "사람들한테 감추고 싶은 감정을 관객들에게 들키는 신이다. 그런 표정은 처음 해봤는데 오상무의 심리가 잘 표현됐다"고 만족해했다.
아내도 "잘했다"고 칭찬했다는 '화장'은 그에게 어떤 영화일까. "영화엔 판타지가 많이 들어가는 편인데 '화장'은 중년 남성의 자화상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서 특별해요."
바른생활 사나이·국민배우의 책임감
5살때 아버지 친구의 영화 '황혼열차'(1957)에 단역으로 데뷔한 그는 경력 60년을 앞둔 자타공인 '국민배우'다. 또한 스캔들 하나 없는 '바른생활 사나이'다. '화장'에서 오상무의 흔들림이 더 절실해 보였던 것도 이런 모범생 이미지 때문이다.
"오상무보다 더 절제하며 살아왔다"며 미소를 지은 그는 "오상무도 추은주에게 쏠리지만 결국 제자리에 돌아온다"며 "잠시 향기에 취해 마비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살아간다'는 건 '의무를 다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가만히 있다고 해서 떨어지는 건 아무것도 없어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선 참고 노력해야 합니다."
안성기처럼 영화만 고집하며 '외길인생'을 걷는 배우도 드물다. 한 번쯤 드라마에 눈을 돌릴 법도 한데 그는 단호했다.
"쪽대본, 밤샘 작업 등 빨리빨리 돌아가는 드라마 제작 환경은 좀 아닌 것 같아요. 영화는 관객들이 돈을 내고 발걸음을 옮겨 극장까지 오는 수고를 해야 하는 장른데 드라마는 집에서 틀면 나오잖아요. 마음이 안 내켜요. 하하. 영화 현장과 사람이 참 좋아요. 드라마 쪽으로 돌아볼 시간이 없습니다."
배우라는 직업이 참 좋다는 그는 "원하는 일을 계속 하는 것 자체가 감사하다"며 특유의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김호정과 임 감독은 안성기에 대해 "인품, 연기 모두 최고"라고 치켜세웠다. 이들뿐만 아니다. 안성기는 후배들이 꼽은 '존경하는 선배이자 닮고 싶은 배우'다.
"부담이 되긴 하는데 '실망시키지 말자'고 다짐하죠. 무엇보다 나를 위해 잘 살아야겠다고 생각해요. 배우는 정년이 없기 때문에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습니다. '이 나이에도 가능하구나'라는 용기를 후배들에게 주고 싶어요. "
100여 편이 넘는 작품을 했지만 아직도 찍고 싶은 영화가 많다. "늘 다음 영화가 기대되고 잘하고 싶어요. 구체적으로 어떤 걸 하고 싶다는 것보단 매작품을 충실히 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그간 주연도 하고 조연도 했는데 존재감이 있어야 하는 게 가장 중요해요. 아무리 큰 역할을 맡아도 존재감이 없으면 의미가 없어요. 비중보다 깊이를 신경 써야 하지요."
배우로 60년 가까이 살아온 그에게 삶이란 무엇일까. 어려운 질문이라며 잠시 생각에 잠긴 얼굴엔 주름살이 완연했다. '남자의 주름살도 아름다울 수 있구나'라는 생각이 스쳤다.
"여러 관점이 있는데 '화장'에서 보는 삶은 '사랑'이라고 생각해요. 사랑이라는 감정의 끈을 놓지 않고 열심히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게 삶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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