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법은 죽이고 유승민은 살리고...일단 봉합
의총서 일부 사퇴의견 반해 다수 옹호…유승민 "송구스럽게 생각하는 계기"
새누리당은 25일 박근혜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국회법 개정안을 국회 본회의 재의에 부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 협상을 주도한 유승민 원내대표는 재신임하기로 뜻을 모았다.
새누리당은 이날 오후 의원총회를 열어 국회로 돌아온 국회법 개정안을 재의결하지 않고 19대 국회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폐기하는 수순을 밟기로 했다.
유 원내대표는 5시간 동안 진행된 의총 직후 기자들과 만나 "의원 다수가 재의 표결을 안하는 게 당청 관계를 위해서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청와대와 국회, 특히 여당이 끝까지 싸우는 모습으로 가는게 안좋다 걱정했다"며 "재의 표결을 안 하기로 결정했다"고 밝혔다.
의석의 과반을 점하고 있는 새누리당이 끝까지 법안 상정에 동의하지 않은 상태에서 국회법 개정안은 19대 국회 임기가 끝나는 내년 5월 29일이 지나면 자동 폐기된다.
김무성 대표도 "박근혜 대통령의 고뇌에 찬 결정은 당이 절대 존중하며 의원들의 입법 행위도 존중돼야 한다"며 "유 원내대표가 마지막에 결론을 냈는데 의원들 다수의 뜻을 받아서 재의에 안 부치는 걸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여당이 박 대통령의 뜻을 존중하는 결정을 하면서 당청 간의 최악의 갈등은 일단 피하게 됐다. 이는 최근 박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 시사 이후 줄곧 뜻을 함께한 김 대표의 의견과 함께 친박계 의원들의 뜻이 다수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앞서 이날 최고위원회의에서 서청원 최고위원은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할 시 당은 대통령의 뜻을 존중할 의무가 있다"며 법안 자동 폐기 처리를 주문한 바 있다.
이정현 최고위원도 "박근혜 대통령은 헌법적 가치를 지키고 수호하려는데 대해선 정치생명도 과감하게 거는 분"이라며 "대통령이 재미로, 취미로 즐기기 위해서 거부권을 행사하는 게 아니다"고 주장했다.
이날 장시간 펼쳐진 마라톤 의총에서는 '자동폐기'와 '표결 후 부결'을 놓고 의원들 간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원내지도부는 친박계를 중심으로 불거진 당내 반발을 무시하지 못했고, 결국 자동 폐기를 결정한 것으로 보인다.
박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통해 직접적으로 비판을 한 유 원내대표의 거취는 일단 유임하는 쪽으로 정리됐다. 의총에서는 김태흠, 이장우 의원이 직접적으로 사퇴를 주장하고 김진태, 박덕흠, 홍문표, 김현숙 의원이 입장 표명을 요구한 가운데 다수 의원들은 유 원내대표를 향해 격려를 보낸 것으로 알려졌다.
유 원내대표는 "내 자신을 되돌아보고 당청 관계에 대한 걱정에 대해서 진심으로 받아들이고 송구스럽게 생각하는 계기가 됐다"며 "당 대표, 최고위원들과 의논해 당청 관계를 복원하는 길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김무성 대표도 "사퇴 요구도 몇 명 있었지만 거의 절대 다수가 '좀 더 잘해주길 바란다. 사과하려면 사과하라' 이렇게 했다"며 "그렇기 때문에 유 원내대표도 의총에서 나온 이야기를 모두 모아 최고위에서 한 번 더 신중하게 논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당청·계파 갈등 넘긴 새누리, 대야 관계 최악으로 접어들 듯
'국회법 개정안 자동 폐기'과 '유승민 재신임'이라는 두 가지 결과를 낸 의총은 친박과 비박 간의 적절한 타협으로 해석된다. 당초 친박계 의원들은 국회법 개정안의 위헌성을 강조하며 유 원내대표의 사퇴를 강하게 주장해왔다. 그러나 당내 초·재선 의원을 비롯한 비박계 의원들은 책임을 유 원내대표에게 떠넘겨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날 의총에 앞서 '소장파' 박민식 의원을 포함해 김세연, 황영철, 정미경, 김성태, 홍일표, 김영우 등의 의원들은 점심 도시락 회동을 갖고 국회법 개정안 사태 해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이 자리에서는 '유승민 기살리기' 방향으로 의견이 모아진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이어진 비공개 의총에서도 자신들의 의견을 강하게 피력했고 결국 유승민 지키기에 성공했다. 그러나 새누리당은 당장의 당청 갈등과 계파 갈등은 막았지만 야당은 물론 정의화 국회의장과의 관계는 해결해야 할 과제로 떠안게 됐다.
여당 의총 결과를 지켜본 야당은 즉각 반발했다. 박수현 새정치민주연합 원내대변인은 국회 브리핑에서 "211명의 국회의원이 합의해 국회를 통과시킨 국민과의 약속을 파기한 것"이라며 "의총 결과를 강력하게 규탄한다"고 압박했다.
이어 "여야 간의 합의도 헌신짝처럼 저버린 배신의 정치다"며 "새누리당은 이제라도 제정신을 차리고 청와대의 거수기에서 벗어나 국회 구성원으로서의 본연의 임무를 다할 것을 강력히 요구, 촉구한다"고 비난했다.
이종걸 원내대표도 전직 원내대표들과 회의를 갖고 "대통령의 팔 꺾기에 여당 의원들이 두려워하는 것 같다"며 "신뢰와 약속을 깨고 그야말로 대통령이 말한 배신의 정치를 한다면 국회에 큰 재앙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야당은 결국 향후 국회일정에 대해 전면 보이콧을 선언, 여야관계도 얼어붙을 전망이다. 유 원내대표는 이에 대한 우려에 "야당과 관계는 야당과의 관계대로 풀어 나가겠다"며 "급한 것은 급한대로 추진하면서 야당을 설득하는 노력을 해나가겠다"고 말했다. 김 대표도 "(야당관의 관계 악화는) 각오를 해야 한다"고 밝혔다.
여당은 정 의장을 설득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할애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정 의장은 꾸준히 여야 어디든 본회의 상정을 요구하면 재의에 부쳐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왔고 이날도 "생각에 변함이 없다. 원칙은 지켜져야 한다"고 했다.
야당은 국회법 개정안을 재의에 부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 상태에서 평소 '원칙론'을 내세우던 정 의장이 어떤 모습을 취할지는 두고볼 일이다.
한편, 여야는 이날 저녁 본회의를 열어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에 따른 후속법안만 처리키로 했다. 조해진 새누리당·이춘석 새정치연합 원내수석부대표는 국회에서 회동을 갖고 감염병 예방 및 관리에 대한 법률안과 대일항쟁기 강제동원 피해조사 및 국외 강제동원 희생자 등 지원위원회 존속기간 연장 동의안 등 2건의 안건만 상정돼 처리하기로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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