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인터뷰] 정우 "천천히 걸어도 단단하게"
영화 '재심'서 변호사 준영 역 맡아 강하늘과 호흡
"무명 버틸 수 있었던 힘은 날 믿어준 사람들"
영화 '재심'에서 변호사 준영 역 맡아 강하늘과 호흡
"무명 시기를 버틸 수 있었던 힘은 날 믿어준 사람들"
배우 정우(36)는 데뷔 17년 차 배우다. 그간 단역과 조연, 그리고 주연 등 비중 상관없이 다양한 배역을 경험했다. 긴 무명 생활을 거친 그는 tvN '응답하라 1994'(2013)로 대박을 터뜨리며 스타덤에 올랐다.
인기에 휩쓸려 곧바로 차기작을 할 법도 한데 신중한 걸음을 내디뎠다. '쎄시봉'(2015)에서 순수남, '히말라야'(2015)에서 산악인으로 변신한 그가 이번엔 정의감 넘치는 변호사로 돌아왔다.
그가 주연한 '재심'은 목격자가 살인범으로 뒤바뀐 '익산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을 스크린에 옮긴 작품. 돈 없고 '빽' 없는 변호사 준영(정우)과 살인 누명을 쓰고 10년을 감옥에서 보낸 현우(강하늘)가 진실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담았다.
영화는 무너진 사법 시스템을 고발하며 대한민국의 민낯을 까발린다.
정우는 누명을 쓴 현우를 믿어주는 단 한 명의 변호사 준영으로 분해 탄탄한 연기력을 뽐냈다.
10일 서울 삼청동에서 정우를 만났다. 정우는 이번 작품과 캐릭터에 애착이 컸다. '한 번 더' 촬영을 외쳤다는 얘기를 하자 쑥스러운 듯 웃었다. "'한 번 더'가 너무 강조된 것 같아요. 하하. 그렇다고 제가 촬영 현장을 압도한 건 절대 아닙니다. 아무래도 실화를 바탕으로 한 메시지 있는 작품이라 더 신경 썼어요. 감독님께 부탁하다시피 해서 '한 번 더'를 외쳤답니다."
현우의 실제 주인공인 최모(32)씨는 지난 2010년 살인과 도로교통법 위반(무면허) 혐의로 구속기소됐으며 이듬해 2월 1심 재판부인 전주지법 군산지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10년 동안 옥살이를 하다 2010년 출소한 그는 지난해 11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약촌오거리 살인 사건을 다룬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봤다는 배우는 "사건 주인공들 마음을 어떻게 알겠느냐"면서 "주인공 최씨의 어머님이 나온 부분을 보면서 울컥했다. 참 가슴 아픈 일이고 최씨가 무죄 판결을 받아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영화를 본 최씨가 어떤 위로를 받았으면 하느냐고 물었다. 그는 "내가 느꼈던 감정을 다른 누군가가 알아줬을 때 오는 감동이 있다"면서 "영화가 그분에게 조금이나마 위로가 됐으면 한다"고 전했다.
실화를 모티브로 한 영화는 결말이 나와 있기 때문에 극적 재미가 떨어질 수도 있다. 정우는 "배우는 감독의 생각이나 감정을 대신해서 표현하는 역할을 하려고 했다"며 "극 설정이 작위적이게 보이지 않게끔 세련되게 인물을 표현하도록 노력했다"고 강조했다.
영화는 준영이 현우의 무죄의 증거를 찾는 '논리적인 부분'보다는 두 인물의 감정에 더 초점을 맞춘다. 배우로서 아쉽진 않을까. "진실을 파헤치는 한 인물의 감정을 보여주는 데 집중했어요. 편견에 사로잡힌 상처받은 사람을 또 다른 사람이 안아주는 이야기예요. 실화 사건을 소재로 했다고 해서 우울한 영화는 아니에요. 자극적이지도, 잔인하지도 않은 따뜻한 작품입니다."
속물 변호사였던 준영은 현우를 만나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한다. 준영이 점차 변화는 과정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게 관건이었다. 배우는 준영을 살아 숨 쉬는 캐릭터로 만들고 싶었다. 빈틈 있는 허술한 변호사로 해석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이번 영화를 촬영하는 동안 캐릭터에 대한 마음과 생각이 깊어졌다. 준영이 현우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간 것처럼.
"준영이 처음 보여준 이기적인 모습들을 현실적으로 보여주고 싶었어요. 누구나 조금씩은 이기적인 면이 있잖아요. 서로 경쟁하면서 상처 주기도 하고. 그런 과정을 거쳐 자연스럽게 바른 길을 걸어가는 준영이를 표현하는 데 신경 썼습니다."
준영도 처음부터 현우를 믿은 건 아니다. 명예욕 때문에 현우의 사건을 많은 그는 사건 수사가 잘못된 걸 알고 의심한다. 이후 현우의 아픔과 상처를 보고 그를 믿기 시작하지만 주변 상황 탓에 흔들린다. 그러다 극 말미 비로소 현우를 믿게 된다. "준영은 현우의 상처를 아물게 해 준 사람이에요. '재심'은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한 사람이 또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과정을 그린 거죠."
실제 박준영 변호사는 뭐라고 얘기했을까 궁금해졌다. "변호사님은 '사람들이 날 훌륭하고 거룩한 변호사라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난 자신을 위해 일한 것뿐이다'고 하셨어요. 참 멋있고 와 닿는 얘기였죠.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마음속에 '정의로움'이 살아 숨 쉬는 분인 듯해요."
극 말미 준영이 현우에게 "널 살인범으로 만든 건 우리"라며 오열하는 장면은 영화의 백미다. 배우는 이 장면 외에도 "내가 니 변호사다. 이제부터", "전 재산 받아본 적 있으십니까. 제가 이겼습니다"라는 대사를 인상적인 부분이라고 꼽았다.
법정에 선 준영이 "본 법정에 선 이유는 (잘못을 저지른) 검찰과 경찰, 법조인에게 사과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라고 한 마지막 장면을 찍을 때는 눈물을 쏟았다. "울컥했습니다. 저는 감정에 솔직해요. 기쁘면 웃고, 슬프면 참지 않고 울어요. 다만 속상하거나 화가 날 때는 스스로를 잘 다스리려고 하지요."
후배 강하늘과의 연기 앙상블은 훌륭했다. '쎄시봉'과 tvN '꽃보다 여행-아이슬란드' 편에서 강하늘과 호흡한 정우는 "강하늘과 친해서 즐겁게 촬영했다"며 "하늘이가 확신에 찬 연기를 한다는 게 느껴졌다. 상대 배우가 불안해하면 나도 불안한데 하늘이는 그렇지 않다. 자신감 있는 모습이 좋았다"고 설명했다.
정우하면 '응답하라 1994' 쓰레기를 떠올리는 대중이 많다. 그는 "'응사' 이후 과분한 사랑을 받아 감사하다"고 미소 지었다.
'응사'와 영화 '바람'이 워낙 큰 사랑을 받았던 터라 매번 두 작품을 언급하는 건 신경 쓰일 수도 있는 부분이다. "저는 작품마다 다른 캐릭터를 맡았다고 생각하는데 보시는 분들은 다르게 느낄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과거에는 '바람' 속 캐릭터와 비슷한 건달 역할만 하느냐는 얘기도 들었어요. 일부러 의식하거나 부담을 느끼지 않아요. 두 작품은 제게 고마운 작품이거든요. 저를 평가하는 것 자체가 관심이 있다는 거니깐 긍정적으로 생각합니다."
배우는 그간 걸어온 길을 돌아본다고 했다. 한 작품을 할 때마다 자기반성의 시간을 갖기도 한다. "'선택과 집중'을 했어요. '물 들어 왔을 때 노를 젓자'는 심정으로 분위기에 휩쓸려서 작품을 선택하지 않았어요. 천천히 걷더라도, 단단해지고 싶었습니다. 한 작품, 한 작품 하면서 앞으로 나아가고 싶어요. 저도 힘들어요. 큰 고민 없이 작품을 하고 싶은 마음이 왜 없겠어요. 근데 뭐 제가 이런 사람이다 보니. 하하."
무명 시간을 버티게 한 원동력은 배우를 믿어준 친구와 가족들이다.
정우는 이제 한 가정의 가장이 됐다. 2013년 동료 배우 김유미와 결혼한 그는 지난해 12월 딸을 얻었다.
영화 홍보 인터뷰에서 개인사 언급이 민망하다고 한 그는 "결혼을 하니 삶의 가치관이 바뀌었다"며 "이전보다 좀 더 가족 위주로 생각하게 된다"고 털어놨다. "딸이 태어났을 땐 보통 아빠들이 느낀 비슷한 감정을 느꼈어요. 아휴, 이런 얘기하는 게 유난스럽게 보일까 걱정돼요."
전작 '히말라야'는 손익 분기점 420만명을 훌쩍 뛰어넘은 770만 관객을 모았다. '재심'의 손익분기점은 165만명. 배우는 "소재가 민감하다 보니 투자가 쉽지 않았다. 손익 분기점을 넘었으면 한다"고 바람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관객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소재가 무겁다고 해서 우울한 영화는 아니에요. 따뜻한 감동과 울림이 있어요. 잔잔하면서도 롤러코스터 타는 듯한 긴장감 넘치는 영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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