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돌 그룹에게 세계관은 떼 놓을 수 없는 ‘숙제’가 된 모양새다. 기존 마블의 영화에서나 볼 수 있던 세계관이 아이돌 그룹에게 유행처럼 번지게 된 건 2012년 그룹 엑소가 놀랄만한 세계관을 들고 나오면서다. 팬들 사이에서는 ‘엑소학(學)’이라고 불릴 저도로 그들이 내놓은 세계관의 규모는, 기존 아이돌 그룹이 데뷔 전 내놓는 몇 장의 티저로는 설명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물론 케이팝에 세계관이 등장한 건 엑소가 처음은 아니다. 아이돌 1세대로 분류되는 H.O.T는 ‘10대들의 승리’를 의미하는 팀명을 큰 틀로 해서, 1집 ‘캔디’ 당시에는 멤버 각자에게 고유 번호와 고유 컬러를 부여했다. 또 구성이나 성격적, 캐릭터적인 성적들을 만들어 가면서 지금의 아이돌 그룹에게 등장하는 세계관이나 콘셉트적인 역할들을 그 당시에도 완벽히 구현하면서 그 시대의 청춘을 노래한 그룹으로 통한다.
물론 ‘콘셉트’에 그치지 않고 이를 ‘세계관’으로 발전시킨 건 엑소의 역할이 크다. 엑소는 생명의 나무와 두 개의 태양, 그리고 평행우주를 사이에 두고 존재하는 열두 개의 전설을 중심축으로 삼고 일식과 월식, 초능력 등 판타지적 요소를 멤버들에게 부여했다. 단순히 멤버들에게 부여하는 캐릭터적인 요소가 아닌 이를 음악과 이미지, 영상 등 거의 모든 종류의 콘텐츠에 적용되면서 촘촘한 서사를 지금까지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한 관계자는 엑소의 세계관에 대해 “데뷔 전부터 팀 전체를 아우르는 명확한 스토리와 콘셉트를 기반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멤버 각자의 캐릭터가 팀의 색깔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었던 것”이라고 평가했다. 또 “엑소를 시작으로 가요계에 ‘세계관 붐’이 일어났는데, 지금의 엑소가 있는 건 단순히 멤버들의 비주얼과 음악뿐만 아니라 팬덤을 뭉치게 할 수 있는 또 다른 요소, 즉 세계관을 함께 풀어나가는 판타지적 요소에서 오는 재미들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엑소의 등장 이후에 세계관은 다른 아이돌에게도 유행처럼 번졌다. 마토 행성 출신으로 위기를 맞은 행성을 구하기 위해 우주를 헤매다 지구에 도착한 그룹 B.A.P는 2012년 데뷔 이후 활동에서 마토 행성의 군인인 캐릭터 마토키와 함께 활동했다. 록 메탈을 기반으로 한 음악으로 활동하고 있는 드림캐쳐는 ‘악몽을 잡아주는 꿈의 요정들’이라는 세계관을 가지고 흑마법, 주술, 악령 들린 인형 등의 소재를 음악에 입혀 그룹의 정체성을 확고히 구축했다.
그룹 전체를 둘러싼 세계관은 조금씩 변형을 거치기도 했다. 방탄소년단과 여자친구가 큰 반향을 일으켰던 ‘시리즈물’을 통해서다. 이들은 각각 ‘청춘 3부작’ ‘학교 3부작’ 등을 내놓으면서 대성공을 거뒀다. 특히 방탄소년단은 케이팝의 글로벌화에 가장 큰 공을 세운 그룹으로, 이들이 선보인 시리즈 앨범을 통한 세계관은 전 세계적으로 ‘케이팝의 성공 요인’으로 꼽힐 정도로 유명해졌고, 지금은 ‘BTS 유니버스’라고 불릴 정도다. 이후 세븐틴 ‘소년 3부작’, 빅스 ‘그리스로마신화 3부작’ 등을 선보이는 등 시리즈 앨범이 봇물 터지듯 가요계에 자리 잡았다.
최근 데뷔하는 아이돌 사이에서도 세계관은 여전히 ‘핫’한 키워드다. 빅히트 엔터테인먼트와 CJ ENM의 합작법인 빌리프랩 소속 엔하이픈(ENHYPEN)은 엠넷 ‘아이랜드’(I-LAND) 통해 탄생한 그룹이다. ‘아이랜드’는 ‘데미안’ 속 ‘새는 알에서 나오려고 투쟁한다’를 모티브로 삼고 여기에 새로운 발견과 연결이라는 메시지를 담아내면서 자연스럽게 폭넓은 세계관을 대중에게 인지시켰다.
지난 23일 첫 앨범을 내고 데뷔한 고스트나인(GHOST9)은 ‘지구공동설’의 스토리를 기반으로 방대한 세계관을 내세웠다. ‘지구공동설’은 지구의 속이 비어 있고, 양극인 북극과 남극에 비어 있는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입구가 있다는 스토리로, 지구 내부 세계에 살던 9명의 고스트가 지구로 넘어와 고스트나인을 만난다는 설정이다. 이들 역시 B.A.P의 마토키와 같이 심벌 캐릭터를 가지고 활동을 함께 한다. 이들의 심벌 캐릭터명은 ‘글리즈’(GLEEZ)다.
FNC엔터테인먼트에서 론칭한 6인조 신예 그룹 피원하모니의 데뷔는 남다른 스케일의 세계관을 설명하는 것으로 시작됐다. 심지어 이들은 세계관을 담은 영화 ‘피원에이치: 새로운 세계의 시작’을 내달 8일 개봉하는 역대급 규모를 자랑한다. 영화는 바이러스로 폐허가 된 세상을 구하기 위해 다른 차원에 흩어진 소년들이 모여 희망의 별을 찾아가는 이야기를 그린 SF물이다. 이제는 리얼리티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넘어 피원하모니의 색깔과 세계관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대중에게 설득력 있게 소구될 수 있는 장치로 장편 영화를 선택한 것.
FNC 관계자는 “하나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멤버, 팬, 음악, 사회적 메시지 등과 조화를 이루며 영웅이 되어가는 과정을 연작 앨범으로 구현해 나갈 예정”이라며 “이번 영화는 케이팝과 케이무비가 융합된 ‘케이팝 시네마틱 유니버스’라는 최초로 시도되는 장르다. 세계관 영화에 소개된 내용들은 앨범의 전반적인 영상, 디자인, 콘텐츠에도 반영될 예정으로 두 장르간의 유기적인 관계를 볼 수 있다”고 설명했다.
이어 “피원하모니의 경우 그룹의 색깔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대중에게 설득력 있게 소구될 수 있는 장치가 필요했는데, 멤버들이 가진 매력이 또래 세대의 공감을 자아내는 시대적인 감수성과 맞닿는 부분이 있어 세계관으로 풀어내기 적합하다고 판단해 장편 영화로 발전시켰다”고 말했다.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통일성 있는 서사는 팬들의 재미를 유발하는 동시에 세계관을 공유하면서 아티스트와 함께 성장해 나간다는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요소다. 또 통일된 세계관을 바탕으로 매 앨범마다 스토리텔링의 확장성 또한 보여줄 수 있다. 다만 대부분의 아이돌이 유행처럼 세계관을 내세우면서 무리한 설정으로 인한 피로감을 주기도 한다. 그래서 최근에는 기획사 내부적으로 전문 작가 등 탄탄한 스토리텔링을 담당하는 외부 인력을 채용하는 등의 움직임도 보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