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선관위 의사결정과정에서 편 들라고 공개적 요구
오랫동안 힘겹게 쌓아온 선관위 신뢰와 권위에 악영향 미쳐
지난 달 중앙선관위원 후보자의 인사청문회 관련 뉴스를 읽다가 아연 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민주당 소속의 한 국회의원이 자당에서 추천한 후보자에게 ‘선관위원이 되면 선관위에서 어떤 결정을 할 때 민주당이 불리한 혹은 공정하지 않은 그런 결정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임무도 굉장히 중요하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민주당에서 추천해 줬으니 선관위의 의사결정과정에서 민주당 편을 들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한 것이다.
이 발언이 논란 되자 이틀 뒤 페이스 북을 통해 ‘정돈된 발언을 하지 못해 오해를 불렀다’면서 민주당 편을 들어야 한다는 취지로 말한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다고 한다. 과연 어느 말이 진심인지는 미루어 짐작할 만하다.
민주주의는 공정한 선거로부터 시작된다. 3.15 부정선거의 아픔을 겪은 우리나라는 일찍이 공정선거의 중요성을 깨닫고,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부와는 별도의 독립된 선거관리기관을 헌법으로 설치하였다. 헌법 제114조에서는 ‘선거와 국민투표의 공정한 관리’를 위하여 선거관리위원회를 둔다고 규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선관위원 인사권을 대통령과 국회, 대법원장으로 분산하고 있다. 또한 선관위원 임기를 대통령 보다 긴 6년으로 하고, 탄핵 또는 금고 이상의 형의 선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파면되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러한 규정들은 선관위원이 정치권력으로부터 벗어나 법과 양심에 따라 공정하게 의사결정을 할 수 있도록 담보하기 위한 장치이다.
선관위원이 되면 자당의 편을 들라는 것은 이런 헌법 정신을 어기라고 대놓고 요구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앞서의 말처럼 선관위원이 추천기관의 입장을 편파적으로 대변한다면 선관위는 제대로 된 기능을 수행할 수도 없고, 헌법기관으로 존재할 이유도 없다. 9명의 선관위원 중에서 3명은 대통령이 임명하고, 국회에서 선출하는 3명은 통상적으로 교섭단체를 구성하는 정당의 몫이다. 단순히 보자면, 여권에서 추천하는 위원이 최소한 4명인 셈이다.
선관위의 의사결정이 다수결 보다는 최대한 합의에 의해 처리되었던 관행을 고려한다면, 정부여당에 불리하거나 야당 또는 경쟁 후보에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결정 자체를 무산시킬 수도 있는 숫자다.
그와 유사한 사례는 중앙선관위 산하 독립기관인 국회의원선거구획정위원회가 2015년에 제20대 총선에 적용할 선거구를 획정하는 과정에서 실제로 나타났다. 정치권의 영향력으로부터 벗어나 독립적. 중립적으로 선거구를 획정해야 할 획정위원들이 사실상 추천정당의 ‘이익을 대변’함으로써 파행을 거듭하다가 결국엔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활동을 중단했던 바 있다.
필자는 오랫동안 선관위에서 근무했고, 중견간부가 된 후에는 위원회의에 배석해 의사결정과정을 지켜보았다. 법관인 위원들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정당에서 추천한 그 어느 위원도 특정 정당에 유리 또는 불리하도록 법리에 어긋나는 부당한 주장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법규 해석상의 차이로 처음에는 의견을 달리하는 경우도 있지만, 토론과정을 거치며 이견을 조정하고 합의에 이르러 결국에는 대부분 만장일치로 결정하였다. 소송이 제기되더라도 법원은 선관위의 결정을 거의 그대로 받아들였다. 이는 정치적으로 편향됨이 없이 합리적이고 타당한 결정이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위원들은 공연한 오해를 받지 않기 위해 친한 지인이라 하더라도 정치적 성격의 모임에는 참석하지 않는 등 사적인 활동에서도 각별히 자중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정치권의 무책임한 말 한마디가 자칫하면 오랫동안 힘겹게 쌓아온 선관위의 신뢰와 권위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렇잖아도 지난 총선과 관련하여 공정성 문제가 논란되고 있는 상황에서 말이다.
어느 정치세력이든 당장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선관위를 흔들거나 이용하려 해서는 안 된다. 특히 여당의 경우, 선관위의 신뢰와 권위가 추락해 대다수의 국민들이 선거결과를 불신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면 결국엔 정부여당의 부담으로 돌아 올 뿐만 아니라, 국정운영에도 큰 어려움에 봉착하게 될 수 있음을 분명히 인식할 필요가 있다.
글/이기선 전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사무총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