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회사 경영 자율성 위축-주주 권리 침해 등 현실적 부작용 커
투기자본·경쟁업체 고의적·악의적 소송 리스크에 그대로 노출
소수주주권 행사시 주식 6개월 이상 보유 의무 무력화로 우려
기업 규제 3법(상법·공정거래법 개정안, 금융그룹통합감독법 제정안)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 기업들이 비상이 걸렸다. 재계는 이들 법안이 규제 강화로 경영권을 침해하고 경영권 방어를 무력화시킬 수 있다며 우려의 목소리를 제기하고 있다. 이번에 통과된 법안들에서 기업들에게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독소조항들을 살펴본다. <편집자 주>
지난 9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된 상법 개정안에서 기업들이 가장 우려하는 항목은 다중대표소송제 신설이다. 투자자들이 자회사 이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는 제도로 기업들이 투기 자본의 무차별 소송 리스크에 노출될 수 있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이번 개정안에 따르면 상장회사인 모회사의 지분 0.5%(비상장회사 1%) 이상을 6개월 이상 보유한 투자자가 자회사(모기업이 지분 50% 초과 보유) 이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할 수 있도록 했다.
모회사 주주가 경영을 게을리 해 회사에 손해를 끼친 자회사 경영진을 상대로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법의 취지다.
이론적으로는 대주주의 위법 행위를 방지하고 소액주주의 경영감독권을 강화하는 수단이지만 자회사의 경영 자율성을 위축시킬 수 있고 자회사 주주들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등 현실적으로 부작용이 훨씬 클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재계의 시선이다.
또 제도 도입으로 해외 경쟁업체나 적대적 인수합병(M&A)을 목적으로 한 투기 자본이 적은 금액으로도 고의적·악의적인 소송을 지속적으로 제기할 가능성이 높아질 것으로 재계는 보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는 무차별적인 소송 제기 방지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자사주 취득에 나서야 하고 주가를 적정 수준으로 관리하려는 노력을 확대해야만 한다. 결국 기업들의 자유로운 경영활동에 제약이 발생하는 규제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재계의 설명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글로벌 경영환경의 불확실성이 더욱 커진 상황에서 기업들의 경쟁력 약화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는 이유다.
경쟁업체나 투기자본들이 국내 기업들을 상대로 악의적으로 소송을 제기하면 글로벌 경쟁에서 차질이 빚어질 가능성이 크다. 신성장동력 발굴, 투자와 M&A에 더욱 집중해야 하는 기업들이 경쟁업체들의 소송 대응에 시간을 허비하면서 경쟁력 제고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다른 국가들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제도의 내용에 더욱 우려가 크다. 현재 전 세계 국가들 중에서 다중대표소송제를 법제화한 국가는 일본이 유일하다.
일본도 모회사가 자회사 지분을 100% 보유했을때만 적용하고 있는 등 악의적인 소송 남용 및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 엄격한 요건을 규정하고 있다.
미국과 영국은 모회사와 자회사의 법인격 분리가 어려워 자회사의 독립성을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인정하고 있지만 이를 법으로 명문화하지는 않고 있다.
다중대표소송제가 도입되면 상장사의 소송 리스크가 현재보다 약 4배 가까이 급증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나왔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상장협)는 지난 7월 국내 2081개 상장사 중 타법인 출자회사 1574곳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다중대표소송제를 도입할 경우 소송 리스크가 3.9배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발표했다.
특히 중소·중견기업의 경우, 경영활동 제약이 더욱 커질 수 있다. 대기업에 비해 시가총액이 크지 않아 제도 도입시 더욱 적은 금액으로도 소송을 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대기업에 비해 상대적으로 자금력이 약해 소송을 막기 위한 자사주 취득과 주가관리에도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을 것으로 보고 있다.
재계에서는 다중대표소송제가 투기자본과 해외 경쟁업체들이 우리 기업들을 공격할 수 있는 수단으로 전락할 것으로 우려하고 있다. 가뜩이나 어려워진 경영환경을 감안해 규제 개혁을 통해 자율적인 기업 활동을 보장해도 모자랄 판에 소송을 통한 발목잡기를 허용하는 것에 비판의 목소리가 높다.
재계 한 관계자는 “다중대표소송제 도입으로 기업들이 투기자본의 소송에 시달리며 경영에 전념하지 못하는 상황이 초래될 수 있다”며 “법률적 대응을 위한 시간과 비용 증가뿐만 아니라 자율성이 보장돼야 하는 경영적 판단도 위축시킬 수 있다는 것이 더 큰 문제”라고 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이번에 통과된 상법 개정안에 소수주주권 행사시 주식을 6개월 이상 보유해야 하는 의무를 회피할 수 있도록 한 조항까지 포함됐다는 더욱 우려를 나타내고 있다.
현행법에서 소수주주권 행사는 지분 요건만 충족하면 되는 일반 규정에 따라 가능하지만 상장회사의 경우, 6개월 이상 보유와 같은 특례 규정을 충족해야 가능하도록 돼 있다.
법에서는 일반규정으로 지분 3% 이상 보유시, 상장회사 특례규정으로 지분 1%(또는 0.5%) 이상을 6개월 이상 보유시 소수주주권 행사가 가능하다고 규정했다. 이 때문에 상장회사 지분을 3% 이상 보유했지만 6개월의 보유기간을 충족하지 못한 경우에 소수주주권 행사 여부가 논란이 돼 왔다.
이에 이번 개정안에서 일반규정과 특례규정 중 한 가지 요건만을 충족하면 소수주주권 행사가 가능하도록 한 것이다. 하지만 '일반 또는 특례' 규정을 선택적으로 충족하기만 하면 돼 6개월 보유 의무는 사실상 무력화됐다는 것이 재계의 지적이다.
결국 상장사라고 해도 투기 자본이 몇일 내에 1~3% 지분을 확보하면 바로 주주제안이나 이사·감사의 해임청구권, 회계장부열람청구권 등을 요구할 수 있게 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최준선 성균관대 법학전문대학원 명예교수 “과거 엘리엇이 삼성물산 지분 7% 이상을 매집했던 사례에서 보듯 대규모 자금 동원력을 갖춘 해외 투기자본이 국내 상장사 지분 3%를 확보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며 "대기업에 비해 자금력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중견·중소기업은 투기자본의 먹잇감으로 쉽게 노출될 것"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