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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종선의 올드무비㉖] 1월 1일의 선택, ‘벌새’


입력 2021.01.11 09:17 수정 2021.01.11 16:30        홍종선 대중문화전문기자 (dunastar@dailian.co.kr)

영화 '벌새' 스틸컷 ⓒ이하 ㈜엣나인필름 제공

2021년 새해도 어느새 열흘이 지났다. 상순의 10일을 보내고, 중순의 첫날이다. 상순이 훌쩍 갔듯 중순, 하순이 가면 새해 첫 달 1월이 과거가 될 것이다. 그렇게 한 달, 또 한 달이 가고 우리는 또 거짓말처럼 금세 2021년의 마지막 날을 오늘로 맞을 것이다. 세상에 시간만큼 성실한 이도 없어서 정말이지 쉼 없이, 게으름 한 번 피우지 않고 ‘따박따박’ 시간은 흐른다.


열흘 전, 신축년 첫날,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매서운 기세 속에 여느 해처럼 해맞이 등산을 가거나 동해에서 새해 첫 일출을 맞이하지 못했던 그날, 무엇으로 의미 있게 한 해를 시작할지 고심했던 그날, 영화를 보기로 했다. 사실 모든 날이 똑같은 소중한 오늘이지만, 사람은 더 잘살기 위해 시간을 나눠 월을 만들고 날을 만들고 시를 만들었기에 새해 첫 영화를 무엇으로 할지 고심이 됐다. 어쩐지 새해 첫날 무슨 영화를 보느냐가 올 한 해 삶의 태도에 영향을 미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자막이 없는 한국영화이고 싶었고, 대작이고 싶지는 않았다. 무엇을 볼지 여러 OTT(Over The Top, 인터넷을 통해 볼 수 있는 TV) 앱을 보고 또 보다가 눈에 띈 게 ‘벌새’였다. ‘벌새’(제작 에피파니&매스 오너먼트, 배급 ㈜엣나인필름)에는 장점들이 있다. 장편 데뷔작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김보라 감독의 탄탄한 연출력, 감정을 만들거나 쏟아내지 않고 발견하고 쌓아가는 인내와 조절의 미를 맛볼 수 있다. 연기를 너무 잘해서 동안을 지닌 성인 연기자가 열네 살 은희를 연기한 게 아닐까 싶어 나이를 찾아봤던, 아직도 10대인 박지후 배우가 주연이다. 또 한 명의 주연 또한 우물과도 같은 연기력으로 매번 큰 만족감을 주는, 매력적 목소리와 발성을 지닌 김새벽 배우가 맡았다. 은희 아버지 역의 정인기를 위시해 조연들의 연기도 매끄러워서 내러티브로의 몰입에 다리를 놓는다.


은희 역의 배우 박지후 ⓒ

영화는 학교에서의 학업과 교우관계, 가정에서의 존재감과 가족관계, 무엇하나 녹록한 게 없는 중학생 은희의 갑갑한 현실과 내면을 비추며 흐른다. 내 아이도 저런 중학생 시절을 보냈으려나, 나도 저런 부모였으려나, 걱정과 반성의 감정이 보태지니 심장이 조여든다. 어찌나 이야기 포인트를 잘 잡았는지, 얼마나 많은 취재를 한 것인지 늘 세상 사람들의 삶에 깊은 통찰을 해온 것인지 김보라 감독이 펼쳐 보이는 에피소드들은 생생하게 현실적이어서 단박에 은희가 처한 상황과 심정이 전달돼 온다.


김보라 감독은 누구에게나 있을 법한 보편적 순간들을 마치 처음 보는 것처럼 발견해낸 에피소드들을 그냥 나열하지 않는다. 정교하지만 자연스럽게 배치했다. 마치 은희의 막막한 세계 안에 서서 한 부분 한 부분 손전등을 비춰 우리에게 보여주는 느낌이다. 눈치 없이 LED 등을 확 켜서 은희의 세계를 소멸시키고, 우리를 멀건 대낮에 서 있게 하지 않는다.


어둡고 메마른, 혼돈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쳐 길이 보이지 않는 은희의 세계에 짝꿍 친구 지숙, 남자친구 지완, 은희를 좋아하는 후배 유리가 잠깐씩 빛이 되었다가 빛의 밝기에 비례해 더 큰 어둠을 드리우기도 하며 시간이 흐른다. 겨우 열네 살이 감당하기엔 버거워 보이는, 답이 보이지 않는 밤길, 그래도 열네 살이니까 밤이 아니라 동이 트기 전 어둑한 새벽길이길 바라며 지켜볼 뿐이다. 더 큰 아픔은 없기를 바라며….


영지 선생님을 연기한 배우 김새벽 ⓒ

그때 숨통이 트이는 순간이 온다. 서예교습소에서 진행되는 한문 수업, 김영지 선생님의 등장이다. 결코, 밝은 기운을 내뿜는 것도 아니고 담배를 피우는 모습부터 한자어구 풀이로 던지는 질문까지 고정된 선생님 이미지와는 다른 모습이지만, 소위 ‘꼰대’ 같지 않고 길지 않은 말이어도 진심의 염려를 건네는 선생님을 은희는 따르고 좋아한다. 막막하고 갑갑하던 은희의 세계가 세상을 향해 조금 열리고, 틈새로 보인 하늘엔 ‘영지 샘’이 태양으로 떠 있다. 너무 멀고 뜨거워 손끝에 잡히지 않지만 은희의 세계엔 따스한 볕이 스며들고 은희는 웃는다.


영화가 여기서 끝났어도 좋은 영화로 기억에 남았을 것이다. 김보라 감독은 자신의 그랜드 디자인,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꺼낸다. ‘시간의 싸움’을 할 줄 아는 감독이다. 조금도 미리 흘리거나 들키지 않고 은희와 영지의 얘기를 들려주다가 갑작스럽게 목격하게 한다. 왜 이렇게 공들여 은희의 고단하고 혼란스러운 세계를 쌓아 왔는지, 영지가 그런 은희에게 얼마나 각별하게 의미 있는 존재인지를 우리가 공감하는 게 왜 중요했는지가 뼈저리게 느껴진다.


날고 싶은 모든 이를 위해… '벌새' ⓒ

‘벌새’에는 절대 잊을 수 없는 한국 현대사의 비극이 등장한다. 있었던 적도 없고 앞으로도 결코 없기를 바라는 사건. 영화로 다룬다면 흔히, 비극의 전조와 사건 발생의 경위, 긴박했던 순간과 눈을 감아버리고 싶은 현실, 그 와중에 선명해지는 자기만 아는 평범한 사람과 타인을 앞세우는 위인, 생의 마지막 순간에 남긴 이야기들을 그릴 수 있다. 아마도 더 극적일 것이고, 틀림없이 펑펑 눈물을 쏟을 것이다.


하지만 김보라 감독은 그 일이 ‘어떻게’ 벌어졌는지가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누구를’ 잃어버린 것인지에 주목했다. 그것도 여러 사람, 여러 경우를 통해서가 아니라 은희가 영지 선생님을 잃는다는 것이 그의 척박한 오늘과 살아갈 인생에 어떤 의미인지를 통해 고통을 짐작하게 한다. 아슬아슬하게 버텨 온 은희의 세계가 무너지는 순간을 지켜보게 한다. 감히 비극의 당사자들에게 그 슬픔을 공감한다는 따위의 얕은 선언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뼈가 저리게 아프다.


새해 첫 영화로 ‘벌새’를 보게 된 것에 감사하다. 잊기 쉬운 어른의 태도, 잊을 수 없고 잊지 말아야 하는 그날이 상기됐다. 내일을 알 수 없는 오늘, 누구를 지키며 살아야 할지 생각해 본 것만으로도 새해 다짐이 됐다.

홍종선 기자 (dunastar@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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