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피디 한 질주는 물론 신기에 가까운 운전실력을 가진 일명 드라이버(The Driver)는 거액을 받고 은행강도를 도주시켜 주는 일을 하는 인물이다. 범인들을 싣고 시내 한복판을 수없이 질주했어도 잡히기는커녕 단서 한번 남기는 일이 없는 프로 중의 프로다.”
지난 2011년 개봉한 영화 ‘드라이브’의 주인공, 이름도 알 수 없는 드라이버에 대한 소개 글 같지만 실제로는 1978년 개봉한 영화 ‘드라이버’에 관해 포털 네이버가 소개한 내용이다. 배우 라이언 오닐이 드라이버로 주연한 영화를 모태로, 33년 뒤 라이언 고슬링을 내세워 다시 제작했다.
드라이버에게는 원칙이 있다. 강도질 후 자신의 차에 타면 딱 5분은 지켜준다, 5분 후에는 알아서. 강도행각에 참여하지 않고, 도주를 위해 총도 쏘지 않는다. 딱 5분, 운전만! 길만 잘 아는 게 아니라 지형지물을 활용하고, 카레이서를 해도 될 실력으로 속도감 있는 질주로 상대를 따돌린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위에 적은 드라이버의 실력과 직업에 관한 설정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드라이브’의 니콜라스 윈딩 레픈 감독은 전작 ‘드라이버’에서의 쫓는 경찰과 쫓기는 드라이버의 팽팽한 대결을 치웠다. 대신, 가족은커녕 이름조차 없는 고독한 드라이버가 새로운 인생을 꿈꾸는 이야기를 그린다.
라이언 고슬링이 주연한 드라이버는 표정도 없고 말수도 적다. 무릎을 칠 정도로 기가 막히게 경찰을 따돌리고 은행강도를 도주시키는 장면으로 짜릿하게 시작한 영화는, 반년쯤 지난 설정으로 다시 시작한다. 드라이버의 삶이 변해 있다. 카센터에서 일하는 것을 주업으로, 영화에서 자동차 액션 스턴트맨 뛰는 것을 부업으로 살고 있다. 아니, 모든 게 달라졌다. 이야기 흐름과 화면 속도가 느려지고 음악도 비트 대신 서정성이 짙어졌다.
일터와 집을 오가는 무료한 일상,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한 여인이 미소를 짓는다, 곁에는 어린 아들이 있다. 같은 층에 내려 바로 옆집으로 들어가는 두 사람. 마트에 갔는데 모자가 보인다. 망설이다 장본 짐을 트렁크에 실어주는 드라이버. 집까지 짐을 옮겨다 주고, 여자가 주는 물을 마신다. 여자의 이름은 아이린(캐리 멀리건 분), 아이의 이름은 베니치오(카덴 레오스 분). 남자는 이름 대신 직장을 말해 준다.
아이린은 차가 고장 나자, 드라이버의 카센터로 오고, 카센터 사장은 드라이버에게 차를 맡긴 모자를 데려다주라고 한다. 머뭇거리다 ‘좋은 곳’을 보여주겠다며 자연을 보여주고 드라이브를 해주는 남자. 이후 남자는 아이린의 집에서 베니치오와 놀고, 아이린을 거들며 자연스레 그들의 일상으로 들어간다. 드라이버에게서 고독의 그림자가 물러나고 아이린이 그의 손에 자신의 손을 포개며 마음을 나누기 시작할 때. 감옥에 있다던 남편이 출소한다.
“인생에 두 번째 기회가 온다는 건 흔치 않은 일이죠. 그러니 축하해야지. 건배하죠.”
아이린 집에서 열린 출소파티에서 남편이 한 말이다. 영화의 주제문장으로 다가왔다. 감옥에서 나와 아내와 아들과 새 인생을 살고 싶은 스탠다드(오스카 아이삭 분)뿐 아니라 현재의 삶이 마음에 들지 않거나 지우고 싶은 큰 실수를 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두 번째 기회’, 어제와는 다른 내일을 바랄 것이다.
아이린도, 드라이버도 마찬가지다. 아이린은 재미있고 낭만적이긴 하지만 위험천만한 남편 대신 말은 무뚝뚝해도 행동과 손길이 따뜻한 드라이버를 통해 두 번째 사랑, 믿음직한 아버지, 단란한 가정을 희망했는지 모른다. 은행강도 도주 일을 멈추고 다른 도시로 와서 카센터 수리공과 스턴트맨으로 사는 드라이버 역시 이전과는 다른 ‘평범하고 안전한’ 인생을 꿈꿨을 것이다. 두 사람은 만났고, 서로의 결핍을 채우며 서로에게 ‘두 번째 기회’가 되어 주었다. 특히 드라이버는 자신이 꿈꿨던 이상의 ‘행운’까지 얻었다. 마치 원래부터 가족이었던 것처럼, 부지불식간에 엄마와 아이가 있는 ‘스위트 홈’의 일원이 되었다.
드라이버에게 평안한 가정이 얼마나 중요한가는 스탠다드가 출소한 뒤의 선택을 보면 알 수 있다. 드라이버는 분명 아이린을 사랑하는데, 보통의 ‘차지하려는’ 사랑 대신 ‘지켜주는’ 사랑을 택한다. 남편의 츌소를 자신의 사랑과 새로운 인생의 ‘방해요소’ ‘장해물’로 받아들이기보다 내가 사랑하는 여자와 그 가정을 지켜주는 모습을 보인다. 해서, 남편과도 사이좋게 지내고 심지어 곤경에 처한 남편을 돕고자 ‘멈췄던’ 그 일을 받아들인다. 이번 한 번만, 차라리 내가 도와서 아이린의 가정을 지키자! 상상하기도 쉽지 않은 큰 사랑으로 드라이버는 자신이 아끼는 아이린과 베니치오를 지키려 한다.
그러나 인생에는 그렇게 호락호락 두 번째 기회가 허락되지 않는다. 첩첩산중, 하나를 해결하면 또 하나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위험을 헤쳐나가기 위해 드라이버는 꽁꽁 숨겨 두었던 ‘싸움의 기술’을 분출시킨다. 스탠다드가 놓친 두 번째 기회, 드라이버는 잡을 수 있을까. 고독한 인생에서 자신을 투명인간 취급하지 않고 쳐다봐 준 사람들, 경계하지 않고 제 집안에 들여준 아이린과 베니치오의 안위를 드라이버는 지켜줄 수 있을까. 그래 지켜낸다면, 그것이 드라이버에게도 ‘두 번째 기회’가 될 수 있을까.
“당신과 베니치오를 만난 건 내 인생에 사건이었어요.”
드라이버의 고독이 흠씬 묻어나는 애잔한 말이다. 더이상 따뜻한 눈길을 마주하는 게 ‘사건’이 아닌 인생을, 어디선가 살고 있기를.
스크린 속 인물인 줄 알면서도 이런 기원이 절로 나오게 한 라이언 고슬링의 ‘인생 연기’, 제64회 칸국제영화제가 감독상을 안긴 니콜라스 원딩 레픈 감독의 색깔 있는 연출, 그저 ‘액션 영화’라고 생각하기엔 깊이와 리듬을 갖춘 수작을 만날 기회를 2011년에 놓쳤다면 10년이 지난 오늘 ‘두 번째 기회’를 잡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