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윤여정이 데뷔 55년 만에 ‘월드 스타’라는 칭호를 얻었다.
우리나라에서 ‘월드 스타’라는 수식어가 붙은 첫 번째 배우는 강수연이었다. 지난 1987년 영화 ‘씨받이’(감독 임권택)로 베니스영화제 볼피컵 여우주연상을 받고, 2년 뒤 ‘아제아제 바라아제’(감독 임권택)로 공산권 최고 영화제였던 모스크바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우리는 그를 ‘월드 스타 강수연’이라고 불렀다. 대단한 연기파이기도 하고 세계적으로 유명한 공리가 ‘귀주이야기’로 베니스에서 볼피컵을 받은 게 ‘씨받이’로부터 5년 뒤일 만큼 대단한 성과였지만, 1987년 당시에는 칸·베를린과 함께 3대 국제영화제로 불리는 베니스에서 상을 받는 것인데 수상자 본인도 몰라 참석하지 못했다. 그랬던 만큼 더욱, 모스크바에서의 수상에 스포트라이트가 터지고 나라가 들썩였다.
두 번째 월드 스타 주자는 한참 뒤에 나왔다. 2007년 영화 ‘밀양’(감독 이창동)으로 전도연이 칸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면서 ‘칸의 여왕’이라는 애칭을 얻었다. 배우 전도연은 국내에서도 익히 ‘연기파’의 대명사였기에 그 수상은 마치 ‘탈 것을 탄 것’처럼 당연시됐다. 그만큼 전도연을 믿고, 이창동 감독을 믿었다. 현지 소식은 ‘뒷북’으로 전해진 게 아니라 실시간으로 낭보가 알려지고, 귀국해 금의환향 기자회견도 하고, 전도연 개인이 왕관의 무게에 짓눌리는 게 걱정될 만큼 우리는 경사를 즐겼다. 높아진 한국영화의 세계적 위상을 만끽했다. 18년 만에 본 늦둥이 자식인 듯 온 국민이 배우 전도연을 아꼈다.
세 번째 주인공은 다시 12년 뒤,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탄생했다. 2019년 영화 ‘밤의 해변에서 혼자’(감독 홍상수)로 배우 김민희가 여우주연상 은곰상을 받았다. 이로써 한국 여자배우는 베니스-칸-베를린 세계 3대 영화제를 섭렵하는 그랜드슬램을 달성했다. 국내 영화시장에서 설 자리가 좁은 것에 비해 세계적 성과는 드높다. 하지만 김민희는 개인사로 인해 적어도 국내에서는 큰 박수를 받지 못했다. 국내뿐 아니라 세계에서도 비슷한 분위기나 연기 톤을 가진 배우를 찾기 어려울 만큼 독특한 아우라를 지닌 연기자인 것은 분명하고, 다시금 한국영화의 국제적 위상을 높인 것도 사실이다.
오는 4월 25일 열릴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 배우 윤여정이 영화 ‘미나리’(감독 정이삭)로 여우조연상 후보에 올랐다. 한국 배우로 최초다. 만일 수상한다면, 1957년 말론 브랜도 주연의 미국영화 ‘사요나라’에 출연한 우메키 미요시 이후 두 번째 아시아계 배우가 된다.
그런데. 모든 관심이 윤여정의 오스카 트로피 수상 여부로 쏠리면서, 마치 상을 받지 못하면 ‘불발’ ‘실패’로 해석될 여지도 커지고 있다. 결단코 아니다. 영화가 제작되고 개봉된 북미 지역에서 33개(캐나다 1개 포함)의 여우조연상 트로피가 배우 윤여정에게로 향했다. 할리우드는 세계 영화의 중심지다. ‘월드 스타’, 세계적 배우이기에 충분하지 않은가.
엄밀히 따지면 봉준호 감독의 말마따나 아카데미 시상식은 국제영화제가 아니라 로컬(local, 지역적) 영화 시상식이다. 그 지역에서 이미 33번 수상자로 호명됐다. 물론 아카데미가 전국구 상인 건 틀림없고, 받으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도 자명하다. 동시에 관타나모 수용소와 이를 만들고 운영하는 미국의 민낯을 드러낸 감동적 실화영화 ‘모리타니안’(감독 캐빈 맥도날드)을 후보조차 올리지 않으며 애써 외면하는 아카데미인 것도 현실이다.
사실, 윤여정은 이미 10년 전부터 글로벌 무대에 오른 세계적 배우다. 지난 2010년 영화 ‘하녀’(감독 임상수)와 ‘하하하’(감독 홍상수)로 칸국제영화제 레드카펫을 밟았고, ‘하하하’는 주목한만한시선 부문의 ‘대상’을 받았다. 바로 2년 뒤 배우 윤여정은 다시 한번 ‘두 상수’와 함께 영화 ‘돈의 맛’(임)과 ‘다른 나라에서’(홍)로 칸을 찾았다. 둘 다 황금종려상도 가능한 경쟁부문이었다.
2012년 당시 윤여정을 칸 현지에서 보았을 때, 그는 여유로우면서도 삶의 본질을 꿰뚫는 촌철살인 유머로 남다른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 진심 그대로 말하기에 3년 전 방송에서 했던 말을, 샴페인 잔을 든 그에게서 생생히 다시 들을 수 있었는데 역시나 속 뻥 뚫리는 웃음이 터졌고 감동이었다. ‘돈의 맛’에서도 파격적 정사 장면이 있었고, 감독도 같았기에 영화 ‘바람난 가족’이 더불어 소환됐다.
“(‘바람난 가족’ 때) 나는 집수리 비용이 만만찮아서 (노출 연기) 한 건데 남들은 잘했다고 하더라고, 예술은 잔인한 거예요. 예술가는 배고플 때, 돈이 급할 때 좋은 연기가 나와. 이 나이쯤 돼 보니 인생이 그런 거예요.”
“한 상수는 돈을 주고 다른 상수는 잘 안 줘. 그래서 또 좀 다른 연기가 되고(웃음). 그래도 얼마나 다행이야, 둘 중 하나라도 주니.”
돈이 아니라 삶에 여유로워 보였고, 말하는 이는 담백하고 직설적으로 하는데 듣는 이는 그 뜻을 되새기게 하는 ‘힘’을 지닌 말들을 했다. 배우들이 흔히 입에 올리지 않는 돈 얘기를 하는 솔직함이 좋고, 배우를 떠나 모든 사람의 ‘밥벌이’와 삶의 엄중함을 무겁지 않게 웃음으로 피력하는 유머 감각이 멋지다.
진정 돈만 중요하다면 돈 주는 쪽, 그것도 많이 주는 이와만 일하겠지만 실제로 윤여정은 “독립영화 고생스러워 싫다”면서도 저예산 영화, 단편영화에 줄기차게 출연한다. 한쪽으로 먹고살고 다른 쪽으로 예술 하는, 예술만 하다 배고파 쓰러지지 않는, 본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현명한 ‘생계형 배우’이자 예술가다. 이런 ‘인생의 맛’이 스며든 유머를 할 줄 알게 살아오고 연기한 것만으로도 오스카 트로피가 무색하다.
한국어 유머만 가능한 윤여정이 아니다. 미국 극장에서 진행된 ‘무대인사’ 영상을 코리아타임즈 유튜브 영상을 통해 보았는데, 영어로도 특유의 유머 감각을 발산한다. 배우 스티븐 연과 한예리가 입을 모아 촬영이 끝난 후 함께 모여 밥을 해 먹고, 오늘 촬영이 어땠는지 얘기하고, 정말 가족처럼 지냈다며 ‘감동의 순간’들을 말하고 있었다. 윤여정은 자신의 차례가 오자 대략 이렇게 말했다.
“뭘 그렇게 진지하니(객석의 웃음). 영화 예산이 적어서 제작비 줄이려고 집 하나 얻어서 같이 먹고 자고 한 거예요, 물론 그래서 말한 것 같은 가족 같은 분위기도 생겼지만(점점 커지는 웃음). 독립영화 힘들어요, 그런 줄 잘 알아서 안 하려고 하는데 어쩌다 또 했네요. 다시 한번 고생할 기회를 준 아이작 정 감독에게 감사합니다(환호와 열광의 도가니).”
와, ‘감사합니다’ 한마디로 뒤집히는 분위기. 옮겨 적지 못하지만 영어였다. 1974~84년 미국에서 10년 산 줄 알고, 예능 ‘윤식당’이나 ‘윤스테이’에서 소위 ‘버터 바른’ 발음 아니어도 길고 긴 문장 아니어도 얼마나 원활한 소통이 가능한지 보여온 윤여정이지만. 놀라웠다. 미국 극장 무대에서 현지인을 코앞에 두고, 늘 해오던 방식대로 말을 해서 외국인들을 박장대소하고 환호하게 했다. 카메라가 객석을 비추진 않았지만, 소리로는 거의 기립박수 분위기.
‘배우로서의 새로운 도전’, ‘돈보다는 가치’와 같은 말을 해도 박수받을 만큼 좋은 연기를 하고서 돈과 몸 고생 얘기를 생글생글 웃으며 하고, 그 유머의 진심이 그대로 통했다. 삶의 관록이 역력히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배우 윤여정은 오스카 얘기를 꺼린다고 전해졌다. 숱한 수상에도 “실제로 상을 받으러 간 건 한 번뿐이라 실감이 나지 않는다”고 반응한다.
최근 들은 가장 멋진 말은 이거다. 굿모닝 아메리카를 비롯해 외신들이 윤여정을 ‘한국의 메릴 스트립’이라고 표현하거나 비유하자 내놓은 답이다. 세계적으로 높아진 한국영화의 위상에 대한 자존심, 배우로서 ‘누구도 아닌 나’라는 명확한 정체성에서 오는 자존감이 빛나는 어록이다.
“그분과의 비교는 감사하지만 저는 한국 사람이고 한국 배우다. 제 이름은 윤여정이고, 저는 그저 저 자신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