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비정전’
<편집자 주> 명작은 시대가 흘러도 명작입니다. 대중과 첫 만남 당시에는 빛을 보지 못한 작품도 시간이 흐를수록 그 가치가 드러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런 작품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 때론 세세하게 때론 개인적으로 이야기해 보려 합니다.
바람둥이 아비(장국영 분)는 매일 오후 3시가 되면 매표소에서 일하는 수리진(장만옥 분)을 찾아간다. 수리진은 결국 아비에게 넘어가 매일 그와 시간을 같이한다. 그러나 결혼을 원하는 수리진과 달리 아비는 구속당하길 싫어하며 이를 거부한다. 수리진과 헤어진 아비는 댄서인 루루(유가령 분)와 또다른 사랑을 이어나간다. 그러나 이들 역시 오래 가지 못한다. 아비는 친어머니를 찾아 필리핀으로 떠난다. 그리고 그런 아비를 잊지 못하는 수리진. 그리고 수리진 곁에 서 있는 경찰(유덕화 분). 서로가 서로를 보는 아픔을 드러내지만, 이들은 정착 못하고 마음과 몸이 떠돌아다닌다. (줄거리)
홍종선 : 4월 1일 만우절이 다가오면, 그날이 되기 전부터 벌써 장국영을 생각하게 되는 것 같아요. 영웅본색, 천녀유혼, 아비정전, 동사서독, 해피투게더... 그의 영화들과 청춘을 함께한 영향인지
유명준 : 만우절 사망. 너무 극적이었으니까요. 오랜만에 영화 찾아 봤는데, 역시나 너무 우울.
홍종선 : 젊은 세대은 어떻게 느끼는지 궁금해요
류지윤 : 저는 사실 ‘아비정전’을 제대로 본게 이번에 처음이었어요. 어렸을 때 명절특집이나 이럴 때 홍콩영화 많이 해줬는데, 그 때도 아비정전을 본 기억은 없더라고요.
홍종선 : 장국영과 만우절의 상관성은 그럼 별로 느껴지지 않는?
류지윤 : 느껴지죠! 그건 저는 그 ‘발 없는 새’ 대사가 이 영화의 대사인지 몰랐어요. 그런데 그 발 없는 새 대사에서 장국영의 죽음이 확 밀려오더라고요
홍종선 : 우리 세대에게는 정말, 거짓말처럼 그가 갔어요. 절대 믿고 싶은 않은, 너무 센 만우절 농담. ‘다리 없는 새’ 이번에 영화를 다시 보면서, 그 ‘발 없는 새’가 장국영처럼 느껴져서 너무 슬펐어요. 계속 날기만 하고 쉬지 못한.
유명준 : 전 오히려 ‘아비정전’이 현재의 젊은 세대에게 와닿을까라는 생각을 해보면 힘들 거 같아요. 저 내용이 홍콩 반환 이야기 나오는 1960년대 배경이고. 혼란스러운 청춘의, 정착하지 못하는 청춘의 우울함 등인데, 그 우울함의 폭이 너무 깊어서 공감대 형성이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오히려 개봉 당시 봤을 때는 공감하고, 뭔지 모르고 푹 들어갔는데. 다시 보니 오히려 전 공감대가 확 떨어진 느낌이죠.
류지윤 : 네 시대적 배경이 그런 혼란스러움에 깔려있긴 한데 그래도 한창 사랑을 하고 이별을 경험한 사람이라면 정서적인 공감은 하지 않을까 싶긴 해요.
홍종선 : 나는 이번에 엉뚱한 게 보였는데. 개봉 당시엔 장국영을 너무 좋아해서, 그가 장만옥, 유가령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나쁜 남자라는 생각도 못했어요. 이번에 보니 자기 우울감이 너무 크고, 버려졌다는 것,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제대로 경험하지 못해서 상처 깊은 자가 다른 이에게 상처 주는 게 보이더라고요.
류지윤 : 관계를 맺고 싶어하지 않는 나쁜 남자의 표본. 관계를 맺으면 소중해지고, 그 소중한 것들이 상처를 주니까 아예 시도조차 안하려고.
홍종선 : 그러게. 그게 이번에 보이더라고요. 일방적 관계. 관계 맺을 줄 모르는. 우리 여자들에겐 아주 미운 사람.
유명준 : 그런데 친엄마에게 버림받고, 새엄마도 정을 주기 어렵고.. 그런 환경이 그런 모습을 만든 듯요. 일면 이해가 되는 게 저런 환경과 저런 감정이라면, 가정을 이루고 싶어 하지 않을 거 같고. 그런 상황에서 여자를 대하는 것 역시 진지하기 어려울 거 같다는. 하지만 또 외롭기는 싫어하는.
홍종선 : 그렇지. 그런 환경들이 우리 아비의 마음의 문을 닫아 버린 듯.
류지윤 : 다 각자 상처받은 시간 속에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요. 그게 외로움이란 자기 무덤 파는 건지 모르고.
홍종선 : 오늘 또 지윤이 주제어를 짚어내 주네. 상처 받은 시간 속에 사는 사람들. 지독히 외로워서 혼자이고 싶지는 않은데. 둘이 되고서도 혼자인 남자. 신기한 게, 아비정전을 떠올리면 맘보 댄스가 제일 먼저 떠올라서. 장국영을 밝게 기억하고 싶은 나의 희망도 작용한 것 같고. 해서 이렇게 우울한 영화인 걸 그새 또 잊고 있었어요.
유명준 : 사실 한 장면인데, 그것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거 같아요. 사실 홍콩영화이긴 하지만, 홍콩의 이미지는 없는 거 같아요. 시대적 배경이나 역사적 배경 그리고 배우들이 나오긴 하지만. 공간이나 이야기의 흐름은 그냥 청춘의 이야기.
홍종선 : 페리를 타고 바라보는 국제금융도시 홍콩의 이미지가 아니라, 그 고층 건물 뒤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간을 비춘 느낌.
유명준 : 그렇죠. 지금도 홍콩 뒷골목 가면 여전히 뭔가 우울한 느낌이 들죠.
홍종선 : 처음엔 나라 잃은 슬픔이었을 듯하고, 그 다음엔 가난, 그 다음엔 반환이 결정되어 자유를 상실할 것에 대한 두려움이 드리운 우울.
유명준 : 그러다보니, 장국영이든 유덕화든 그냥 계속 떠도는 거 같아요. 사람이든 장소든 정착 못하고 서로 등보면서 그냥 쭉 돌아다니는 느낌이죠. 유가령과 장만옥은 장국영을, 장학우는 유가령을, 유덕화는 장만옥을.
홍종선 : 그러게 계속 떠도네.
류지윤 : 영화가 습하고 눅눅하고 푸르스름한게. 녹조 가득한 어항 속에서 영화 보는 기분이랄까요. 물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느낌이랄까.. 뭐 그런 느낌도 받았어요. 저는.
유명준 : 영화 톤이 전체적으로 어두우니까. 다시 보니 밝은 장면이 그다지 없어. 그래서 습한 느낌이 강한 듯.
홍종선 :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의 등을 보는 사랑, 그러나 멈출 수 없는 사랑은 얼마나 쓸쓸할까. 맞아 밝은 장면이 거의 없어. 그래서 영화 초반, '아비정전' 타이틀 떠오르는 배경. 필리핀의 숲이랄까 밀림이 역설적으로 느껴지는. 그래서인지, 이번에 영화 보고 맘보 댄스의 배경음악 자비에 쿠거의 ‘마리아 알레나’를 ‘냇킹 콜’ 버전으로 틀어놓고 수없이 들었어요. 좀 더 느리고 흑인가수 특유의 진한 음색이 '아비정전'에 어울리더라고요.
유명준 : 그러고 보면 새 이야기는 정말. 한 곳에 정착 못하는, 아니 정착하면 죽는, 떠돌고, 사랑하지만 사랑 못하고. 결국 이들은 ‘다리 없는 새’처럼 정착 못하고 떠돌다고, 오히려 정착하면 그 생을 마감하는 것 같죠.
홍종선 : 정착하면 죽는. 그러네. 다리 없는 새에게 정착은 죽는 그 순간이 유일. 영화 내레이션에 나오듯.
류지윤 : ‘다리 없는 새’가 다리가 없어서 정착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마지막에 그 새는 죽었기 때문에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고 말하는 게 저에게 이영화의 반전.
홍종선 : 맞아. ‘이미 죽어 있었다’. 그런데 나는 개인적으로는 ‘아비정전’의 장국영보다 ‘해피투게더’의 장국영이 아름다워 보여요. 동성애자가 이성애 연기를 한다는 건 그야말로 연기. 사랑이라는 감정을 자신도 아니까 그 감정으로 연기할 테고. 특히 ‘아비정전’은 아픈 청춘을 연기하니까 자기 안에서 꺼낼 감정도 많았겠지만, 영화의 우울감과 일치되면서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 것 같아요. 그런데 ‘해피투게더’에서는 자신의 정체성대로 연기해서인가, 역시나 우울한 영화인데도 순간순간 아름답게 빛나. 사랑 받는 느낌. 아휘로부터 사랑 받는 보영. 양조위가 아휘 역을 너무 잘했어요.
유명준 : 아비정전 후속작이 안 나온 것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양조위가 마지막에 등장해 미끼 던지고 튀었는데.
류지윤 : 아 저 그 장면에서 어리둥절했어요. 한참 찾아봤네요.
홍종선 : ‘먹튀’지. 정말.
유명준 : 그러다보니 양조위 등장은 정말 뜬금없는 장면이 되고 말았죠.
홍종선 : 아비에 이은 또 하나의 나쁜 남자. 그러나 색깔은 다른 그 멋진 남자를 맛보기로 보여 준 후, 기대를 키운 뒤 왕가위 먹튀. 아비가 사라져도. 이 세상엔 그런 남자가 얼마든지 있다는 얘기를 왕가위가 하고 싶었던 것 같은데.
유명준 : 그런데 한편으로는 '아비정전2'가 만들어졌다면, 1의 저 느낌을 이어갈 수 있을까 라는 생각도 들었어요.
홍종선 : 왕가위 감독은 원래는 스핀오프를 제작하려 했는데 '아비정전'이 흥행이 덜 되면서. 제작자들이 손을 떼서 물거품이 됐는데. 이후 왕가위 감독이 성공하고서도 ‘아비정전2’는 없다고 공언. 만들어지지 않은 게 나은 것 같아요, 결과적으로. 또 양조위는 왕가위의 숱한 영화에서 그 매력을 뿜뿜 발산했으니.
유명준 : 그리고 사실 양조위에게는 그런 느낌이 없어요. 나쁜 남자가 아니라, 약간 나쁜 놈으로 바뀔 느낌? 여자 입장에서, 장국영은 보호해주고 싶지만, 양조위는 보호해주고 싶나라는 생각이.
홍종선 : 보호받고 싶어. 그런 듬직한 책임감의 남자에게는. 어떻게 해도 화내지 않고 품어줄 거 같은 느낌.
유명준 : 장만옥이나 유가령은 어떠셨어요?
홍종선 : 아, 장만옥. ‘화양연화’가 제일 아름답다고 생각했는데, ‘아비정전’에서 어찌 이리 풋풋 아름다운지 연기는 역시나 잘하고.
유명준 : 정말 풋풋. 90년대 어릴 적 남자들은 홍콩영화에서 왕조현파와 장만옥파가 있었죠.
홍종선 : 유가령은, 사실 이번에 처음으로 연기 잘하고 그래서 아름답다고 느낌. 판빙빙 같은 전형적 중국 미인. 장만옥은 분위기가 ‘넘사벽’. 뭔가 슬픔을 꾹꾹 눌러 담는 느낌이랄까.
류지윤 : 영화 말미에 전화걸 때, 다 엇갈려버려서. 저는 유덕화랑 장만옥이 사랑에 빠질 줄 알았는데.
홍종선 : 사랑을 허락할 왕가위가 아니야. ‘아비정전’ 에서 유덕화 정말 멋있어. 이름도 없는 경찰 아저씨. 섣불리, 내가 너의 아픔을 치유해 줄게. 나서지 않고 공중전화 앞에 매일 머물며 전화를 기다리고. 엄마를 보살펴야 해서. 낮에는 엄마 곁에, 밤에는 야간 순찰 경창. 그러나 엄마 돌아가시니 자신의 꿈인 선원이 되기 위해 경찰을 그만두고. 그렇게 꿈의 실현을 코앞에 두고 선원이 되어 배를 타기 직전 그저 내가 사랑하는 여자가 좋아했던 남자를 외면하지 못하고 소용돌이에 휘말리고 넘 불쌍해.
유명준 : 사실 남자들이 생각하는 멋은 장국영보다는 유덕화류죠. 귀걸이 가지고 여자 꼬시는 장국영보다는 실속은 없지만.
홍종선 : 귀걸이 꼬시는 장면은 진짜 장국영이 하지 않았으면 양아치..
류지윤 : 하지만 언제나 청춘의 여자는 양아치에 넘어간답니다.
홍종선 : 장국영이 장만옥 꼬시는 건 정말 세계 최고의 비법이라 생각해요. 시계를 보게 하고, 1분을 같이 바라 봐. 이미 가까이서 숨결을 나누고... 말없는 가운데 움직이는 초침과 심장 뿐. 우리는 1분을 함께했다. 부인할 수 없다, 이미 과거가 되었으니까!
<‘아비정전’은>
홍종선 : 코로나19가 잠잠해져서, 홍콩 만다린 오리엔탈호텔에 가고 싶다. 25층 바에서 장국영을 추억하며 '아비정전'을 다시 보고 싶다. 다리 없는 새가 그 곁을 날까.
류지윤 : 노력해도 이뤄지지 않거나, 만나려 해도 만날 수 없거나, 이미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있는 다양한 형태의 미완성 사랑
유명준 : 보는 내내 불안감과 안타까움과 씁쓸함을 안겨줬다. 그런데 그것이 지금의 현실이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