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시애틀은 가을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단다. 올가을이라고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가 잠잠해져서 시애틀의 가을을 보기는 힘들겠지만, 영화 속에선 여행을 떠날 수 있다.
중년들에게 시애틀은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감독 노라 에프론, 1993)으로 직결된다. 시애틀에서 혼자 아이 키우며 사는 잠 못 이루는 샘 아저씨(톰 행크스 분)와 라디오 사연 하나 듣고 그에게서 운명을 느낀 애니(맥 라이언 분), 그런 애니를 묵묵히 바라보는 월터(빌 풀만 분)의 사랑 이야기. 언젠가 올드 무비 코너에서 따로 소개해야 마땅한 멜로 명작. 엇갈릴 듯 결국 이어지는 운명 하나면 최고의 설렘이었던 그때, 1990년대를 대표하는 로맨스 영화다.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을 무척이나 좋아한 감성 충만 여자가 있다, 이름은 쟈쟈. 마음속으로 들어온 남자 하나에 인생을 걸고 아기도 가졌다. 짧은 영어, 시애틀 공항에서의 입국 심사를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 하나로 통과한 쟈쟈는 언뜻 보기에 철없는 명품족 같다. 혈혈단신 미국으로 원정 출산 온 상황에서도 “2배 줄게” “3배면 돼?” “얼마든지 낼게”를 연발하며 안하무인 행세다.
영화 ‘시절인연’(감독 설효로, 수입·배급 ㈜드림웨스트픽쳐스, 2013) 얘기다. 쟈쟈를 탕웨이가 연기했는데, 배우의 3력을 모두 갖춘 덕에 밉상 연기도 예쁘다. ‘배우 3력’은 필자가 주장하는 바인데^^, 어떤 배우가 대중의 사랑을 받고 유지하는가에 대한 개인적 견해다. 연기력, 성적 긴장감 유지력, 인간적 매력이 배우를 스타로 만들고 스타성을 유지하게 한다고 생각한다.
배우로 살아남는 데 있어 연기력은 기본이다. 이성에게든 동성에게든 성적 긴장감을 느끼게 하고, 일시적이 아니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다면 배우는 인기를 얻는다. 반드시 잘생기고 예뻐야 하고 육감적 몸매이거나 근육질이어야 한다는 게 아니다, 끌림(attractive aura)을 느끼게 하는 힘을 말한다. 이보다 한 수 위가 인간적 매력이다. 이유를 모르겠는데 어쩐지 정이 가고, 그가 살아온 이력이 마음을 움직이게 하고, 지지하고 응원해서 내가 지켜 줘야 할 것 같은 느낌. 대중이 어떤 배우에게 이런 매력을 느낀다면, 그것이 지속하는 한 그는 스타다.
조금만 바꾸면 가수에게도 적용할 수 있다. 연기력만 가창력으로 바꾸면 된다. 요즘 대세 중의 대세인 임영웅, 영탁, 장민호, 이찬원을 생각해 보면 우리가 그들을 좋아하고, ‘미스 트롯2’가 끝났음에도 식을 줄 모르는 인기가 설명 가능하다. 가창력은 기본, 끌어당기는 힘이 대단하고, 인간적 매력이 엄청나다.
탕웨이로 다시 돌아와서. 여행용 가방까지 명품으로 휘감고 세상에 자신만 중요하고 남들은 안중에도 없는 쟈쟈이건만 탕웨이가 연기하니 귀엽기 그지없다. 양조위와 열연한 ‘색, 계’(감독 이안, 2007), 현빈과 호흡을 맞춘 ‘만추’(감독 김태용, 2011)에서 한 시도 경계를 늦추지 못하는 탕웨이의 어지러운 마음과 흔들리는 눈빛을 기억하는 우리로서는 밝고 밝은 탕웨이가 반갑다.
공교롭게도 ‘만추’의 배경도 시애틀이어서 그때는 울고 이번엔 웃나, 제멋대로인 쟈쟈를 ‘인생 총량의 법칙’을 적용해 ‘이번엔 그래, 맘껏 밉상짓 해라’ 너그러운 마음을 발동시키는데. 아뿔싸, 그 아름다운 시애틀이 탕웨이에겐 웃기 힘든 곳인가 보다. ‘만추’에서도 애나는 2년 뒤 자신의 출소일에 만나기로 한 훈을 기다리지만, 그는 끝내 오지 않는다. 오지 못한 거지만, 애나는 이를 알 길이 없다.
‘시절인연’에서도 내막을 알고 보니 아이 아빠는 유부남, 아내를 의식해 애인인 쟈쟈를 아는 이 하나 없는 미국으로 내쫓다시피 보낸 거였다. 그의 사과는 수천만 원을 호가하는 에르메스 가방인지 크리스마스에 온다던 그는 오지 않고 가방만 도착한다.
인생은 불행만 연이어 오진 않는다. 견딜 만하고 살 만하게 행운이 곁들인다. 쟈쟈의 행운은 사실, 시애틀공항에 도착할 때부터 곁에 있었다. 프랭크라는 이름의 운전기사. 그는 미국에서 아이를 낳으려는 중국 여성들을 돌보는 산후조리원에 데려다주는 역할을 하는데, 쟈쟈가 예약해 둔 곳이 단속에 걸려 폐쇄되자 거처를 마련해 준다. 규모는 작을지 몰라도 사람 사는 냄새가 나는 주택형 산후조리원이다.
프랭크는 싱글대디로, 중국에서는 의사였지만 미국에서는 운전기사를 하며 딸 아이의 양육에 집중하고 있다. 숨겨둔 운명이 하나 있는데, 실은 쟈쟈와 프랭크가 중국에서 만난 적이 있는 사람들이다. 영화를 보며 운명을 느껴보길 바란다. 프랭크는 오수파가 연기했는데, 이렇게 자상하고 따뜻한 남자 어디에 없을까 싶을 만큼 조용하게 빛나는 캐릭터를 완성했다. 수염이 있을 때와 없을 때의 모습이 엄청난 반전이다. 알고 봐도 깜짝 놀랄 만한 변화다, 이 또한 영화를 통해 확인하길.
영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의 샘도 싱글대디인데, 뉴욕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의 전망대에서 애니와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시애틀에서 울고 뉴욕에서 해피엔딩을 맞는다. ‘시절인연’은 영화 시작부터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 대한 사랑을 고백했고, 이는 엔딩 장면까지 이어진다. ‘만추’에서 ‘시절인연’이 되도록 시애틀에서는 눈물의 기억이 더 많았던 탕웨이가 드디어 뉴욕에서 웃는다. 그것도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서다.
재미있는 사실은 좋은 건 또 봐도 좋다. 애니와 샘의 만남에서 안절부절못해 놓고 마치 처음인 것처럼 또 엇갈림을 걱정하는 나를 발견한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전망대에서 쟈쟈와 프랭크, 프랭크와 쟈쟈가 다시 만나기까지엔 우여곡절이 깊다. 하지만, 운명의 얄궂은 장난은 언젠간 끝나고 진정한 사랑을 향해 미소 짓는다. 그 미소를 맛보는 것만큼 가슴 벅차오르게 뿌듯한 일이 또 있을까, 내 일이 아닌데도 말이다.
외국영화의 한국 제목을 짓는 일이 어려운 건 너무나 잘 알지만, ‘시절인연’이라는 제목이 관객을 극장으로 불러들이는 데 효과적이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다. 베이징에서 스쳤던 인연이 시애틀에서 이뤄졌다는 중국어 제목, 내게 맞는 사람 혹은 운명의 남자를 찾는다는 영어 제목이 훨씬 더 공감이 간다. 배우 정우성과 고원원 주연의 ‘호우시절’(감독 허진호, 2009)과 어쩐지 비슷한 제목임에도 관객의 마음을 확 끌어당기지 못해 아쉽다. 혹시나 제목 때문에 마음이 덜 움직였던 당신이라면, 탕웨이와 오수파를 믿고 선택해 보자. 시애틀과 뉴욕으로의 여행만으로도 즐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