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공유가 오랜만에 캐주얼 신사복 화보에서 튀어나온 듯한 상큼한 모습을 대중 앞에 드러냈다. 아이보리 컬러의 피케셔츠에 린넨 소재인지 편안하게 주름지는 오트밀색 바지를 입고, 청 데님 사파리 점퍼를 걸쳤다. 마스크까지 푸르게 맞췄다. 마스크를 빼고 사진을 찍는 모습이 ‘안녕~’ 인사를 하고 요트에 올라 바다로 항해를 떠날 것만 같은 느낌이다.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코로나19)을 훌훌 떨치고.
지난 12일 열린 영화 ‘서복’(감독 이용주, 제작 STUDIO101·CJ ENM, 배급 CJ ENM·티빙) 언론시사회에서의 모습이다. 영화도 코로나19를 떨칠 수 있을까. 이용주 감독이 9년 만에 우리에게 내놓은 영화는 ‘건축학개론’과 사뭇 다르다. 당시 우리가 가슴 속에 품고 있던 ‘첫사랑의 추억’을 꺼내 설레게 또 웃음 짓게 했다면, 이번엔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을 지배하고 있는 ‘죽음에 관한 두려움’을 액션과 휴먼드라마 장르로 펼쳐냈다. 주제의식은 진중하고 액션은 간단치 않다.
매일 자는 잠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특별하지 않게 태어난 일이 또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인생사 모든 것이 불명확해도 언젠가는 죽을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명확하다는 것이 진실로 얼마나 감사한 것인지, 그렇게 평범하고도 한정돼 있기에 우리의 인생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이용주 감독은 우리에게 역설한다. 그리고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본질, 인생의 본질을 누수 없이 우리에게 전달하는 훌륭한 매개체는 공유, 박보검, 장영남, 조우진을 비롯한 명배우들이다.
주변 2030 여성들에게 영화 ‘서복’을 추천했다. 우선은 아무런 설명 없이 “서복, 괜찮더라고요”만 말했다. “누가 나와요?”라는 질문이 되돌아왔고, “공유, 박보검이요”라고 답했다. “와! 현실이에요? 무조건 봐야겠네” 예상 이상으로 반긴 후, “장르가 뭐예요? 두 배우 사이에 여자 배우도 나오나요?”라며 멜로영화인지 궁금해했다. “장르는 영화 보고 확인하는 게 좋을 것 같고, 일단 멜로가 아니라는 것까지는 얘기할게요”라고 하니 무척이나 좋아하며 예매를 얘기했다. 같이 볼 여자친구를 구해서 함께 볼 거란다. 어떤 이는 조우진이 나온다는 얘기에 “요새 여러 영화에서 열일 하는데 봐줘야 해요. 영화를 잘 고르는 것 같더라고요”라며 애정을 드러냈고 “옷을 잘 차려입었다”고 전하니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했다.
기본적으로 영화에 대한 정보 없이 보는 걸 좋아하기에 상대에게도 별다른 정보를 말하지 않으려던 것이었는데 예상치 못하게 몇 가지를 확인했다. 관객에게 영화라는 작품을 데려가는 첫 번째 주체는 역시나 배우, 누가 출연하는지부터 대번에 묻는다. 내 맘에 쏙 드는 두 배우가 나올 때 두 남자의 사랑을 받는 여자 주인공이 되어 멜로를 즐기고 싶어 할 것 같지만, 두 배우의 매력을 만끽할 수 있는 장르를 좋아한다. 주인공뿐 아니라 주연 배우들에게 관심이 있고, 조연으로 누가 나오는가도 선택을 강화한다.
다시 언론시사회 날로 돌아가 보자. 당시 공유는 자신의 첫 등장 장면이 많이 편집된 것에 대해 아쉬움을 표했다.
“오늘 완성된 영화를 처음 봤는데, 민기헌의 첫 등장이 굉장히 많이 편집됐더라고요. 원래 변기를 잡고 구역질을 하는 게 첫 등장이고, 또 첫 촬영 신이었습니다. 그 장면을 찍고 양쪽 목에 담이 왔던 기억이 있어요. 구역질을 리얼하게(실감 나게) 하고 싶었고, 촬영 후 양쪽 목에 담이 와서 고생했는데 생각보다 그 장면이 많이 간소화돼 있더라고요. 편집돼서 기분 나쁘다는 얘기는 전혀 아닙니다.”
웃음과 함께 말했지만, 아쉬움은 분명히 묻어났다. 필자는 배우 공유가 자신이 ‘고생한’ 장면이 편집돼서 속상하다는 얘기를 한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럼 무엇에 대한 아쉬움일까.
영화를 보면 공유가 연기한 민기헌이 초중반까지 상당히 화를 많이 낸다. 작은 일에도 크게 화를 내고, 계속 낸다. 영화를 보면서 생각했다. ‘와, 이거 공유 아니었으면 나도 화날 뻔했다’. 무슨 얘기인고 하니, 만일 어떤 배우가 지닌 성향과 이미지를 우리가 모르는 상태에서 그 배우가 민기헌을 연기했다면, 그냥 화를 잘 내는 캐릭터로 오해했을 것이고 그럼 짜증이 나기 십상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공유가 맡았다. 자상함과 따뜻함의 대명사, 영화 ‘도가니’ ‘부산행’ ‘82년생 김지영’ 등 여러 영화를 통해 우리에게 그렇게 각인된 배우 아닌가. 그러니 믿고 기다릴 수 있었다. 짜증 내는 이유가 있을 거야, 곧 달라질 거야! 영화 ‘서복’의 민기헌이 공유여야 했던 이유가 여럿인데 그중 하나다.
배우 공유는 첫 장면에서 민기헌의 몸 상태와 피폐해진 인생이 고스란히 전해지길 바랐을 것이다. 교모세포종이라는 뇌종양 명이 언급되지 않아도, 한때 국정원 에이스였던 그가 무슨 일을 겪었기에 인생 포기한 사람처럼 사는지 이유가 드러나지 않아도, 바싹 마른 몸과 얼굴로 자신을 향한 역겨움을 토악질하는 첫 등장으로 고뇌를 표출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래야 서복(박보검 분)에게 화를 내는 모습이 실은 자신에게 내는 짜증이고, 뇌에 생긴 병으로 죽어가는 영향도 있다는 것을 관객이 알아주길 바랐을 것이다. 그런데 그토록 마음의 무게를 실어 연기한 장면이 다량 덜어져 있으니 당황과 실망감이 순간 몰려왔으리라.
하지만 배우 공유에게 말하고 싶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다른 이가 아니라 공유가 연기했다는 것을 잊지 말라고. 관객은 애정의 무게로 장면을 느낀다. 애정이 크면 짧은 괴로움도 길고 크게 느껴진다. 깊이 공감한다. 앞서 말했듯 민기헌이 짜증과 화를 내도 ‘이유 있다’고 믿으며 지켜본다. 그러니 아쉬워 말라고, 당신을 아끼는 관객을 믿으라고.
사실 공유뿐 아니라 ‘서복’은 배우 캐스팅이 기막힌 영화다. 인류 최초의 복제인간 서복은 열 살 나이에 스무 살 신체를 지닌 소년이다. 어른의 몸을 지닌 소년 연기, 우리가 복제인간에 대해 가지는 ‘온전히 인간과 똑같지는 않을 것 같고 약간은 로봇 느낌이 있을 것 같은’ 선입견을 충족시키면서도 누구보다 인간다운 연기를 하기란 쉽지 않다. 자칫 밋밋하게 딱딱하게 느껴질 수 있는 말투는 기본, 수많은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어딘가 비어있는 느낌이 모호할 수 있다. 그런데 박보검이 하니 단조로운 듯한 연기에도 집중시키는 힘이 있다. 마지막 영화의 모든 요소가 대폭발할 때까지의 짧지 않은 시간 동안, 서복의 말과 움직임이 지루하다고 느끼지 않게 한다.
민기헌과 서복을 심히 괴롭히는 국정원의 안 부장도 조우진이 연기하니 평면적 악인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저 악랄하기만 하지도 않고, 그저 바보처럼 당하는 공권력도 아니다. 무서울 정도로 악랄한데 조우진이 하니 얄밉기 그지없고, 민기헌과 서복에게 뒤통수 맞을 때면 고소해서 웃음이 난다. 그는 열혈 정극 연기를 하는데 우리가 그를 밀었다 당겼다 웃으며 즐긴다. 조우진이 그간 쌓아온 유쾌한 이미지, 뭘 해도 지독히 열심히 하는 캐릭터 덕이다.
장영남은 드라마 ‘사이코지만 괜찮아’ 이후 반전을 기대케 하는 배우가 됐다. 조커를 연상시키는 명연을 보여줬던 그가 이번에도 무언가 하나를 숨겼다. 화면에 등장하는 분량이 많지 않음에도 학자로서, 어머니로서의 번민을 깊이 있게 소화하고 우리에게 전달한다. 임세은 박사의 마지막 선택에 가슴이 저릿하다.
관객을 기다리게 하는 힘을 지닌 공유와 박보검, 맡겨진 배역 이상으로 풍부하게 표현해내는 조우진과 장영남. 그리고 그들을 캐스팅해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세계관을 보여준 이용주 감독. 그들이 함께 만든 영화 ‘서복’, 극장에서도 볼 수 있고 티빙으로도 볼 수 있다. 극장에서 큰 화면으로 즐겨도 좋고, 외출이 걱정된다면 집에서 즐겨도 좋다. 건강과 안녕이 중요한 요즘, 우리가 생각해 볼 만한 묵직한 질문을 받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