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잘했다고 꼽기엔 다들 너무 잘했다. 허성태(장덕수 역), 박해수(조상우 역), 유성주(장기적출 의사 병기 역), 위하준(잠입 경찰 황준호 역), 정호연(탈북자 강새벽 역), 이유미(목사 딸 지영 역), 아누팜 트리파티(이주노동자 알리 압둘 역), 이상희(유리장인 도정수 역)는 물론이고 카메라가 오래 잡고 있지 않아도 열의를 다한 게임 참가자 역과 얼굴이 보이지 않음에도 질서와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 ○(일꾼),△(병정), □(관리자) 역의 배우들, 짧은 등장에도 문을 열고 닫은 공유까지 모두 잘했다.
한 명 한 명 다 발견해 소개할 수 없음이 안타까울 만큼 ‘오징어 게임’(연출 황동혁, 각본 황동혁, 제작 ㈜싸이런픽쳐스, 배급 넷플릭스)의 배우들은 누구에서 장면을 멈추든 부족함이 없는 연기를 보여 주었다. 개인적 취향과 사견을 전제로 오일남 역의 오영수, 한미녀 역의 김주령 그리고 성기훈 역의 이정재 배우에게서 짜릿함을 느꼈다. 선입견을 지우는 대단한 연기력, 기대 이상의 무엇을 보아서다.
먼저 001번, 이름도 번호처럼 ‘일번 남자’ 일남 역의 오영수, 그의 연기는 배우가 나이 들어 좋은 이유를 보여 준다. 바짝 마른 몸에서 노기 아닌 깊은 에너지를 발하고, 데뷔 59년 차 내공은 치매인지 아닌지 속는 건지 속이는 건지를 헷갈리게 하는 오묘함을 일남에게 드리운다. 특히나 노인이기에 가장 약체이고 불리한 구성원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던 세 번째 게임에서 보여 주는 지혜, 배우 오영수는 제갈공명을 방불케 하는 현명함과 카리스마를 설득력 있게 연기했다.
누구보다 밝게 웃으며 게임에 참가하는 모습에서는 배우뿐 아니라 사람이 나이 들어도 좋은 이유를 보게 한다. 살아온 날보다 살아갈 날이 적으면, 죽음이 코앞에 오면 우리도 삶의 부차적 요소에서 자유롭게 되고 이 순간 즐기고 누려야 할 것에 집중하게 될까? 하는 생각 속에 오영수 노인을 미소 속에 바라보는 나를 발견한다. 뒤에 어떤 반전이 온다고 해도 환한 웃음의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사람은 나이 들며 어린이로 돌아가고, 왔던 곳으로 되돌아가는 모양이다.
배우 오영수는 영화 ‘동승’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드라마 ‘무신’ ‘불이문’ 등에서 노스님 역으로 등장하며 ‘스님 전문 배우’로 불리고 그가 연극계에서 쌓은 공과는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얼굴은 익숙하되 조·단역 배우로 인식되던 차, 넷플릭스 대작에서 주인공 이정재와 가장 많은 호흡을 맞추는 주연으로 등장해 한 치의 밀림 없이 때로 기훈을 가지고 노는 듯한 힘을 발휘하니 놀라움과 감동이 더욱 컸던 게 사실이다. 연륜이 무엇인가를 여실히 보여 주는 열연이었다.
212번, ‘한 미모’ 하는 한미녀 역의 김주령은 준비된 배우는 언제든 기회만 오면 ‘충만한’ 연기를 해낸다는 것을 확인시켰다. 각종 드라마나 영화에서 엄마나 이모 역을 소화할 때, ‘한국의 양자경’ 같은 미모에 독특한 연기력이 눈에 띄곤 했다. 영화 ‘도굴’에서 동구(이제훈 분) 일행에게 부동산 물건을 소개하는 중개소 사장님으로 등장, 인간 굴삭기라 불리는 삽다리 역의 임원희에게 호감을 보였는데 카메오 출연임에도 어찌나 코믹하면서도 섹시하게 표현하는지 혀를 내둘렀다. “아니 왜 존스 박사(조우진 분)도 있는데 삽다리야, 그렇게 헛다리 짚으면 안 되는데”. 마치 아는 동생 일인 양 걱정하게 하는, 짧은 출연에도 너무나 현실감 있게 훅 다가오는 매력이 넘쳤다.
처음엔 ‘오징어 게임’에서도 남자 보는 눈이 여전한 건가, 걱정스러웠다. 아니었다. 동두천에서 청량리까지 매음굴에서 잔뼈가 굵은 미녀는 전쟁터 같은 게임에서 살아남을 방법, 빈약하나마 자신의 무기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움직였다. 의리는커녕 인간미조차 없는 장덕수(허성태 분)에게 줄을 서다 못해 몸을 섞다니, 생존의 엄중함이 느껴졌다. 꼬집어 주고 싶게 얄미운 캐릭터지만 애잔하게 다가오고 어느 순간 그의 생존을 응원하게 하는 ‘관객 흡인력’이 배우 김주령에게서 발산됐다. 벼랑 끝에서 ‘깍두기’로 부활했을 때 박수가 절로 나왔다.
사실 ‘오징어 게임’의 많은 인물은 그 캐릭터에 일관성이 있다. 하지만 한미녀는 살아남기 위해 세상의 바닥을 기었던 인생처럼 게임장에서도 무슨 짓이든 하고 어떤 모습으로든 변신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일관성이 없는 것으로 보이는 것은 기본, 자칫 인물이 지나치게 산만하거나 시끄러워서 배우 자신은 물론 극의 매력을 떨어뜨릴 소지가 컸다. 하지만 김주령은 게임이 바뀔 때마다 달라지고, 변화된 양상에 빠르게 적응하는 모습을 실감 나게 연기했다. 롤러코스터 같은 한미녀의 처지와 감정을 뜨겁게 연기했다. 드라마 유일의 노출 연기도 주도적으로 소화했다. 극의 표현을 빌리자면 ‘남탕’ 드라마에서 존재감을 확실히 새겼다.
배우 이정재는 그야말로 ‘인생 연기’를 과시했다. 윤혜린(고현정 분)을 지키는 보디가드 백재희로 등장한 드라마 ‘모래시계’(1995), 정우성과 함께 퇴폐미를 발산한 영화 ‘태양은 없다’(1998) 이래 누가 그의 매력에 이의를 달 것이며. 대한민국 대표 연기파 배우 황정민과 어깨를 나란히 한 ‘신세계’(2012), 왕이 될 관상 수양대군이 되어 한 마리 검은 늑대를 연상시키는 카리스마를 뽐낸 영화 ‘관상’ 이후 누가 그의 연기력을 의심하겠는가마는. 이정재는 그 후에도 ‘신과 함께’ 시리즈(2017), ‘사바하’(2019),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2020) 등을 통해 연기력의 확장을 보여주었다.
그랬음에도, 단연코 ‘오징어 게임’이 최고다. 우리가 흔히 스크린 밖 이정재에 대해 가지는 인상, 모델 같은 아우라와 재벌가 이미지 등 화려한 모습을 완전히 제거한 극빈층 연기로 이룬 성과여서 의미가 있다. 배우 개인이 풍기는 인상을 활용하는 것은 분명 캐릭터 표현에 유리한 지점이 있고, 그래서 여러 배우가 존재하고 제작진도 그 색과 향을 고려해 캐스팅한다. 그런데 배우 이정재는 자연인 이정재의 모습을 말끔히 지우고 전혀 다른 인물을 연기했고, 전 세계의 박수를 받아 마땅할 만큼 매우 잘했다. 오롯이 연기력으로 승부해 쾌거를 이룬 것이다.
상상하면 웃음 나는 장면이 있다. 추레한 옷을 입고 표정 하나, 눈빛 하나마저 낙오자의 그것을 한 성기훈. 대기업 다니던 평범한 서민 가장에서 인생 막장으로 떨어진 사내의 초라함이 이정재와 하나 됐기에 ‘짠한 아저씨’로 첫인상을 받은 세계의 시청자는 스타 이정재의 모습을 보면 얼마나 이채로울까. 그저 인터뷰 사진이나 레드카펫 장면 하나만 봐도 놀랄 일이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의 잔인한 사이코 킬러 레이를 본다면 같은 배우인가 할 만큼 한 치의 선함도 발견하지 못할 테니 말이다.
456번 이정재를 선두로 ‘오징어 게임’ 출연 배우들에 대한 세계적 관심이 대단하다. 이 중에 누가 어디까지 수직 성장할지 궁금하다. 오랜 연마로 좋은 색과 향을 지닌 배우, 매력 은행의 잔고가 두둑한 배우, 외국어 구사 등 해외 진출이 용이한 배우 등 결국 준비된 자가 웃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