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하기

카카오톡
블로그
페이스북
X
주소복사

서태지, 왜 문화대통령인가


입력 2022.03.26 07:07 수정 2022.03.26 06:02        데스크 (desk@dailian.co.kr)

ⓒ데일리안 DB

1992년 3월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난 알아요’로 데뷔했다. 그들은 데뷔하자마자 거대한 폭풍을 불러일으켰고 올해가 데뷔 30주년이다. 한국 가요계는 아직도 서태지가 설계한 흐름 속에 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데뷔는 바로 케이팝의 탄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전까지는 발라드, 트로트 등이 우리 가요계의 주류였다. 인기 댄스 그룹도 있었지만 오늘날 우리에게 익숙한 본격 댄스음악팀은 아니었다. 음악 자체가 우리 가요와 서구 팝 사이엔 현격한 차이가 있었다. 나이트클럽에서 모르는 노래가 나와도 전주만 듣고 가요와 팝송을 구분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그 모든 것이 바뀌었다. 이 팀의 리더인 서태지는 서구의 최신 댄스음악과 랩, 록음악 등을 버무려 한국형 댄스음악을 만들어냈다. 거기에 이주노와 양현철이 이태원 문나이트에서 갈고 닦은 본격 댄스를 선보였다. 순식간에 댄스음악이 한국 가요계의 중심을 차지하게 됐다.


라디오로 팝을 이미 많이 접했던 이들은 기존의 가요가 아닌 새 음악을 들을 준비가 돼있었다. 10대는 그들만의 새로운 문화를 갈구했고, 장차 X세대로 불리게 될 20대도 변혁을 원하고 있었다. 바로 그때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한 것이다. 이때부터 전주만 듣고는 가요와 팝송을 구분할 수 없게 됐다. 팝음악을 뒤쫓기만 하던 가요가 서태지에 이르러서 마침내 따라잡기에 성공한 것이다. 10~20대는 열광했고 순식간에 이들이 한국 가요계 핵심 소비자가 됐다.


‘발해를 꿈꾸며’, ‘교실 이데아’는 사회 발언으로 우리 사회에 충격을 안겼고, 힙합을 전면에 내세운 ‘컴백홈’은 가출한 청소년을 귀가시키기도 했다. 또 사전심의를 통과하지 못한 ‘시대유감’의 노랫말을 아예 삭제해 논란을 촉발시켰다. 이런 서태지의 도발과 서태지 팬덤의 저항에 정태춘 등의 운동이 더해져 마침내 사전심의제도가 폐지됐다.


이 정도로 사회적 파장을 일으킨 가수는 없었다. 음악적으로도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한국 가요계는 댄스음악 중심 구도가 굳어졌고, 음악의 수준도 팝음악 수준으로 상승했다. 아이돌과 팬덤문화도 생겨났다. 그 아이돌에 의해 오늘날 한류시대가 열렸다.


서태지는 뮤지션의 권리 신장을 위한 싸움도 이어나갔다. 가수의 공연 영상이 무단 유통되는 관행에 제동을 걸었고, 방송가의 부속품처럼 활용되던 가수를 스스로의 음악에 주인이 되는 뮤지션으로 격상시켰다. 음악을 창작하기 위해 방송을 중단하는 관행도 서태지가 만들었다. TV 음악순위프로그램 출연시에 사전녹화하는 새로운 전통도 만들었다.


그럴 때마다 ‘유난을 떤다’, ‘거만하다’, 이런 식의 비난이 방송가에 일었지만 서태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결국 그가 간 길이 바로 역사가 되고 새로운 관행이 되었다. 서태지 팬덤은 팬덤의 사회적 활동을 선도했다.


미국에서 보는 음악의 시대를 연 마이클 잭슨에게 주어진 칭호는 팝의 황제다. 한국에서 비디오의 시대를 연 서태지는 문화대통령이라 불린다. 대통령이라 불린 뮤지션은 서태지가 유일무이하다. 단지 음악이 인기를 얻은 수준이 아니라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수많은 변화를 일으킨 시대의 중심이었고, 그의 영향이 그후 수십 년간 이어졌기 때문이다.


1990년대는 1990년에 시작했지만, 문화적으로는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한 1992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됐다고 할 수 있다. 그때 한국 가요계의 ‘현대’가 시작됐다. 아직도 그때의 흐름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장기 90년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역사의 출발점이 바로 1992년 3월,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한 그 순간이었다.


글/하재근 문화평론가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기사 모아 보기 >
0
0
관련기사

댓글 0

0 / 150
  • 최신순
  • 찬성순
  • 반대순
0 개의 댓글 전체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