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아나이스 인 러브’
영화는 시대를 반영한다. 영화를 통하면 시대의 흐름에 따라 가치관과 사고, 문화 현상의 변화까지도 감지할 수 있다. 최근 가장 많이 변화된 것을 꼽자면 여성의 지위에 관한 것이 아닐까 한다. 나라별로 정도의 차이는 있을 수 있지만 1950년대과 1990년대 그리고 지금의 여성상은 전혀 다르게 바뀌었다. 여성 스스로가 변화된 것은 물론 사회문화적으로 여성을 대하는 태도도 달라졌다. 여권은 신장했고 여자 스스로 당당하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간다. 이러한 추세는 영화에도 반영되어 거침없이 자기 인생의 주인공으로서 사는 여성 캐릭터를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최근 개봉한 영화 ‘아나이스 인 러브’는 서른 살의 아나이스가 자신의 인생을 거침없고 후회 없이 살아가는 당차고 열정적인 여성의 모습을 그린다.
항상 바쁘게 뛰어다니는 아나이스(아나이스 드무스티에 분)는 자신을 세상의 중심으로 놓고 삶을 살아간다. 남자 친구 라엘과는 헤어졌지만 적당히 이성적인 관계를 유지한다. 아이를 임신한 아나이스가 라엘을 찾아가 상의도 없이 임신중절 수술을 하겠다고 말하자 라엘은 그녀를 떠난다. 우연히 엘리베이터 안에서 중년의 남성 다이엘을 만나 짧은 연애를 시작하지만 아나이스는 그보다 다니엘의 동거녀 에밀리(발레리아 브루니 테데스키 분)에게 더 관심을 갖는다. 그녀를 본 아나이스는 그동안 만났던 남자에게 느끼지 못하는 묘한 감정에 빠져들게 된다.
주체적이며 능동적인 현대 여성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삶을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적극적인 여성 아나이스는 남들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현재 자신의 감정에 충실할 뿐이다. 과거 여성들이 남들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해 감정을 숨겨왔던 것과는 달리 자신의 내면에 집중하며 적극적이고 솔직한 현대 여성의 모습을 아나이스를 통해 반영한다. 또한 아나이스는 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남자 친구 라울의 아이를 임신하지만, 아직은 아이를 원하지 않는다면서 혼자 임신중절 수술을 결정하고 곧 헤어진다. 그녀는 젊은 남자에 이어 중년의 남자 그리고 그의 동거녀에게까지 능동적으로 세 명의 연인들과 만남을 이어간다. 영화는 무엇보다 세상의 중심은 ‘나’라는 사실, 여성의 주체적인 삶을 강조한다.
그동안의 퀴어 영화와는 다른 차별화된 서사를 보여준다. 대부분의 많은 퀴어 영화들은 성 정체성에 대해 깊이 있는 고뇌를 다뤘다면 이번 영화는 자신 안에 생겨나는 사랑의 감정에 대해 그것을 인지하고 받아들이는 모습을 담았다. 사회가 부여한 경계 그 자체가 아닌 그것을 넘어선 욕망에 집중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충동적이고 산만했던 주인공이 한 남자와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가지 못했던 것 역시 마음속에는 다른 욕망이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나이스는 다이엘의 동거녀 에밀리에게 빠져들고 56세의 유명작가 에밀리도 30살의 젊은 여성의 유혹에 매력을 느낀다. 남자들과의 열정 없던 관계에 지루해하던 아나이스는 그녀에게서 그전과 다른 감정을 느낀다. 두 여자는 욕망 이상의 존재로 서로에게 다가간다.
두 배우의 깊이 있는 대사가 울림을 준다. 영화는 프랑스 영화답게 감정과 대사로 사람들의 마음을 흔든다. 아나이스의 대사를 통해 사랑을 음미할 수 있고 에밀리의 대사를 통해 인생의 깊이를 느낄 수 있다. ‘사랑할 때면 주변이 안 보이고, 사랑은 안 하던 짓까지 하게 된다’는 아나이스의 말을 통해 진정한 사랑의 의미와 현재의 삶을 사랑하라는 메시지를 준다.
헨릭 입센의 ‘인형의 집’ 이후 여성들의 자아를 찾는 여정은 계속되어 왔다. 우리 사회에서도 각 분야에서 인권과 지위를 높이면서 여성들이 약진하는 모습을 잘 볼 수 있다, 영화 ‘아나이스 인 러브’는 이러한 시대적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또한 임신과 사랑에 대한 기존의 관념과 경계를 넘어서는 여성의 주체적인 삶에 대해 어려운 질문을 던지고 있다.
양경미 / 연세대 겸임교수, 영화평론가film102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