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턴가 나도 모르게 커피 애호가가 되었다. 어떤 커피가 입맛에 맞는 것인지도 모른 채 단골로 다니는 카페는 없지만, 커피 향과 맛, 카페 분위기가 마냥 좋다. 샌프란시스코 여행 중에 찾아가 마셨던 커피 맛은 지금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나를 사로잡았다. 그런 커피는 매일 마셔도 좋을 것 같았다. 우리나라에서 그 커피 맛을 볼 수 있다니 꿈만 같다.
지난 겨울 샌프란시스코를 여행할 기회가 있었다. 관광버스를 타고 꼬불꼬불한 산길을 따라 ‘트윈 픽스’ 전망대에 올랐다. 그리 높지 않아도 온 시가지가 훤히 내려다 보이는 멋진 곳이다. 구름 낀 날씨이기는 하지만 샌프란시스코만을 가로질러 놓인 금문교를 비롯하여 아담하게 보이는 항구와 도시는 엄마 품에 안긴 아기처럼 조용하고 평화스러웠다.
‘피어 39’ 부둣가로 내려갔다. 많은 관광객이 음식을 먹거나 커피를 마시며 쉬고 있는데도 바닥이 훤히 보일 정도로 깨끗하고 그 흔한 종이컵 하나 떠다니지 않는다. 스티로폼과 플라스틱 통이나 폐어구들로 지저분한 우리나라 항구와 너무나 대조적이라 잠시 시선을 고정한다.
가이드는 자유시간을 주면서 부두에 인접한 ‘페리 빌딩’안 ‘블루보틀’ 본점의 카푸치노가 부드럽고 맛있다며 꼭 마셔보란다. 일행보다 앞서 뛰어 찾아갔지만 이미 손님들이 길게 줄을 서 있다. 시간이 촉박하여 다른 곳은 구경 못 하더라도 커피 맛은 봐야겠다는 심정으로 기다렸는데 예상보다는 빨리 나온다. 이렇게 감사할 수가. 커피 한 모금을 입안으로 들이키는 순간 동공이 커지면서 황홀함이 몸을 휘감는다. 이때까지 마셨던 어떤 커피보다 달콤하면서도 부드러워 혀를 놀라게 한다. 다양한 종류의 커피를 마셔봤지만 이런 맛은 처음이다. 맛있는 커피를 맛볼 수 있도록 소개해 준 가이드가 고맙다. 오랫동안 음미하기 위해 한 모금씩 천천히 마신다. 시간이 촉박하여 아내와 둘이 한 잔만 시킨 것이 후회스러워 한잔 더 주문하려는데 시간이 없다. 명문대학 출신이 개발한 것이라 역시 맛이 다르다는 생각이 든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맛본 블루보틀 커피를 잊을 수 없어 귀국하면 곧바로 우리나라에도 입점했다는 카페를 가 보고 싶었는데 6개월도 더 지나서야 블루보틀 서울 역삼점을 찾았다. 간판도 없이 푸른 병 그림만 걸려있다. 매장은 별로 크지 않고 바리스타들의 커피 제조 과정이 훤히 보이고 황토색의 나무 탁자와 의자만 있는 단순한 구조다. 나는 카푸치노, 아내는 라떼를 주문했다. 기다리는 동안 입에 착 감기는 그 커피를 맛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설레기까지 한다. 다른 카페보다는 시간이 좀 더 걸렸지만 미국에서 마셨던 것과 같은 맛의 커피가 솜사탕처럼 입속으로 스르르 스며든다. 그동안 머릿속으로만 그렸던 커피를 서울에서 직접 음미하자 소원을 푼 것처럼 가슴이 후련해지며 희열이 느껴진다. 상품 전시대 위에는 원두와 냉동건조된 커피를 비롯하여 커피잔과 텀블러, 가방 같은 상품이 손님을 기다린다. 관심 있게 둘러보자 종업원이 옆으로 와서 냉동 커피 만드는 방법과 마시는 요령을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미국에서 식사할 때 종업원들이 수시로 와서 음식의 맛이 어떠냐고 물어본 것처럼 미국에서 들어온 커피점이라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든다.
블루보틀 커피가 우리나라에 제일 먼저 들어온 곳은 2019년에 개업한 성수점이다. 한국에 첫 지점을 냈을 때 영업시간 전부터 줄을 길게 서서 기다리는 ‘오픈 런’(open run) 현상을 불러일으켰을 만큼 화제를 모은 커피전문점이다. 1호점이 궁금해졌다. 뚝섬전철역에서 내려 조금 가다 보면 붉은 벽돌로 된 4층 건물이 눈앞에 다가선다. 줄을 길게 서야 한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휴가철이라 그렇지 않아 다행이다. 출입문을 열고 들어가자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과 넓은 공장이나 창고 같은 매장이 보인다. 특별한 실내장식도 없이 노출콘크리트 공법 그대로 확 트여 시원하고 개방감이 느껴진다. 이미 커피를 마셨지만, 여기의 커피 맛은 어떤지 궁금하여 또 주문했다. 그 자리에서 원두를 갈아 따뜻한 물로 내려준다. 미국에서 마셨던 그 맛 그대로다. 오늘은 블루보틀 카페를 두 곳이나 방문하며 샌프란시스코에서 마셨던 잊을 수 없는 커피 맛을 음미했다. 오늘 밤에 잠을 설칠 수도 있겠지만, 소원을 풀었으니 후회하지 않으리라.
블루보틀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이미지는 파란색 병 로고다. 창업자인 제임스 프리먼은 UC버클리 예술대학 출신으로 교향악단의 클라리넷 연주자로서 해마다 10만 킬로미터나 순회공연을 다녔다. 공연하기 위해 비행기를 탈 때도 손수 볶은 커피 원두를 들고 다니며 뜨거운 물을 요청해 내려 마실 정도로 커피 사랑이 지극했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연주자로 활동하다 좋아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결심한 후 교향악단을 그만두고 커피 사업에 뛰어들었다. 온종일 몇 초 간격으로 로스팅 시간과 온도를 달리하며 커피 개발에 몰두하였다. 손수레에 직접 만든 커피 추출기를 싣고 농산물 직거래장터 같은 곳으로 나가서 60그램씩 커피를 저울에 달아 94도의 물 온도를 맞춘 핸드드립 커피를 팔았다. 오랫동안 꾸준하게 연구한 결과 맛있는 커피가 탄생한 것이 아니겠는가?
48시간 이내 로스팅한 원두만을 사용한다는 고집스러운 철학을 갖고 있다. 철저한 장인정신과 완벽주의가 성공의 열쇠가 아닌가 한다. 커피 본연의 맛과 향을 최대한 즐길 수 있도록 매장의 공간을 단순하게 디자인했으며 커피에만 집중하도록 와이파이도 없다. 다소 느리더라도 고객의 기호에 맞는 최상의 품질을 지닌 커피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하며 이 과정을 투명하게 공개한다는 것이 카페의 방침이라고 한다. 한국 진출 이후 서울 9곳과 제주도 1곳에 매장을 운영하고 있으며, 글로벌 커피 브랜드이면서도 현재 미국과 일본, 중국, 홍콩 정도에서만 만날 수 있다.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맛볼 수 있다니 자주 즐겨야겠다.
커피는 쓰고 쌉싸름하여 별로 맛없는 음료 중의 하나였으나 이제는 세계인의 기호품이 되었다. 어떤 이는 인생의 쓴맛을 보지 못해 커피 맛을 느끼지 못한다고도 한다. 커피 소비가 최근 들어 크게 늘고 있는 것은 그만큼 삶의 고달픔이 깊어짐에 따라 커피 맛을 제대로 알게 된 탓인가. 생의 고난은 커피의 쓴맛과 많이 닮았을 터이다. 그러나 이 나이에 더 이상의 쓴맛은 알고 싶지 않다. 이제 입맛에 딱 맞는 커피를 찾았으니 블루보틀처럼 부드럽고 매력적인 맛과 향에 점차 빠져들고 싶다.
조남대 작가ndcho5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