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공연계에서 성별에 관계없이 배역을 정하는 ‘젠더프리’ 캐스팅, 한 배우가 고정 배역 없이 여러 캐릭터를 돌아가면서 연기하는 ‘캐릭터프리’ 작품이 등장하면서 배우들에겐 기회의 폭을, 관객들에겐 선택의 폭을 넓히는 시도가 이어지고 있다.
지난 2021년 국내 초연한 뮤지컬 ‘하데스타운’도 올해 7월 12일 재연을 통해 헤르메스 역에 최정원을 내세우면서 젠더프리 캐스팅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있다.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를 잇는 한국 최초 여성 헤르메스의 탄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헤르메스의 선창으로 시작하며 관객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도입부 넘버 ‘로드 두 헬’(Road to Hell)은 무대 위 모든 캐스트를 소개해야 하는 만큼 객석을 압도하는 매력이 필수인 넘버다. 그래서 초연 당시 작품의 시작과 끝을 알리며 오르페우스에게 지하세계로 가는 길을 인도하는 헤르메스 역은 최재림, 강홍석 등 남자 배우들의 몫이었다.
그런데 재연을 맞아 이 역할에 초연 당시 이 역을 맡은 최재림, 강홍석과 함께 여자 배우인 최정원이 캐스팅된 것이다. 업계에선 걱정보단 기대하는 분위기가 크다. 이미 최정원은 36년의 무대 경험으로 쌓인 내공과 ‘맘마미아!’ 1000회 이상 공연, ‘시카고’ 전 시즌 참여 등 철저한 자기관리로 자신의 기록을 깼다. 심지어 지난해에는 ‘컴프롬어웨이’ ‘멤피스’ 에 참여하는 등 새로운 도전에도 거침이 없었다.
하지만 우려가 아주없는 건 아니다. 이미 초연에서 헤르메스의 성격이 각인이 되었기 때문에 대중에게 ‘헤르메스’는 ‘남성’이라는 이미지가 편견으로 자리잡혔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결국 젠더프리가 아닌, 젠더크로스에 더 가까운 캐스팅이 될 여지가 높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성별에 상관없이 배역을 정하는 것이 아닌, 남성 배역인 헤르메스를 여성 배우인 최정원이 연기하는 것이 된다는 것이다.
한 공연 관계자는 “별 것 아닌 듯한 이 작은 관념의 차이가 관극을 함에 있어서 엄청난 몰임감의 차이로 작용할 수 있다”면서 “어떤 고정관념을 가지고 공연을 보는지에 따라 극에 얼마만큼 몰입할 수 있는지가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젠더프리 캐스팅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헤르메스라는 캐릭터를 ‘남성’이라는 성적 고정관념에 가두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하데스타운’에 앞서 국내에서는 수년 전부터 젠더프리 캐스팅이 시도되어 왔다. 첫 젠더프리 캐스팅 작품으로 언급되는 이지나 연출의 뮤지컬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2015)를 시작으로 ‘광화문연가 ’아마데우스‘ ’몬테크리스토‘ ’창문 넘어 도망친 100세‘ ’아마데우스‘ 등의 공연도 배역 설정에 남녀 구분을 없앴다. 또 흔하지 않지만 ’데미안‘ 등 캐릭터프리 작품도 무대에 올려지기도 했다.
공연 관계자는 “프리 캐스팅이 무조건 좋은 건 아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공연을 볼 수 있다는 점, 다양성에 있어서는 분명히 새로운 선택지가 될 수 있지만, 아직까지는 관객들이 받아들이는 부분에 있어서 거부감이 있을 수 있다. 이는 작품 전체에도 방해가 될 수 있는 부분”이라며 “특히 최근 티켓 가격이 높아진 상황에서 관객들은 최대한 안전한, (품질이) 보장된 회차를 관극하길 원한다. 실험적인 것에 투자하지 않는 추세라면 제작사 역시 그런 것을 만드는 것에 움츠러들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꾸준히 다양성을 위해 투자하고 도전해야 하는 것이 이 업계의 과제”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