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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에 여운을 남기고 [조남대의 은퇴일기(59)]


입력 2024.08.27 14:07 수정 2024.08.27 14:07        데스크 (desk@dailian.co.kr)

손주와 조부모 사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짝사랑 같은 것이 아닐까. 한쪽은 무심한 듯한데 다른 한쪽은 애틋함에 몸부림치고 있으니 말이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애증이 얽히지만 한 세대 건너뛴 손주 사이에는 사랑스러운 감정만 남는 것 같다.


미국과 라오스에서 2년을 보낸 손주들이 두 달간의 일정으로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현지를 방문하여 만나기도 했지만, 온 가족이 귀국한다고 하니 손주들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린다. 떠날 때 손자는 네 살, 손녀는 여섯 살이었는데, 어느새 제법 자라 말귀를 알아들을 수 있을 정도로 의젓해졌다. 맞이할 준비로 흐트러진 집을 정리하고 남겨두었던 장난감을 챙기느라 분주하다. 지난번 만났을 때 깍듯하게 존댓말을 쓰는 손자와 동생을 잘 챙기는 손녀를 보며 딸과 사위가 자식 잘 키웠다는 생각에 흐뭇했었다.


인천공항으로 귀국하는 손녀와 손자 ⓒ

멀리 떨어져 있지만 페이스톡을 통해 손주들의 일상을 잘 알고 있었다. 보고 싶을 때마다 전화했기에 손주들도 우리의 모습이 생각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듯 다소 무덤덤한 태도다. 그런데도 직접 만날 날이 다가오자 아내는 달력에 날짜를 표시해 놓고 기다린다. 도착시각보다 넉넉하게 공항에 도착했다. 입국장에 들어서니 좋은 자리에는 이미 젊은 엄마들이 자녀들을 맞이하기 위해 조그마한 플래카드를 게시해 놓은 채 묵직한 카메라를 들고 진을 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우리도 환영하는 쪽지라도 한 장 들고 왔다면 손주들이 더 기뻐하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밀려왔다. 하지만 젊은 엄마들은 애교로 봐 줄 수 있겠지만 나이든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그렇게 한다면 주책스러워 보이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에 미소만 지어본다.


한참을 기다려 ‘할부지’ 하며 달려오는 손주를 품에 안으니 혈육의 온기가 전해진다. 집으로 오는 길 내내 이어진 이야기들 속에 시간의 흐름도 잊었다. 딸네 집에 짐을 풀었지만, 오랫동안 비어있던 집이라 어설프고 먹거리도 부실하여 손주들의 발길은 길 건너 우리 집을 수시로 들락거린다. 매일 같이 늘어나는 장난감은 집안 곳곳에 흩어져있고, 소파 커버와 등받이는 언제나 엉망이다.


집을 방문한 삼촌과 장난을 치며 놀고 있는 손주 ⓒ
야외 미끄럼틀에서 물을 뿌리며 장난치는 손자와 손녀 ⓒ

손녀는 신문지를 말아 만든 공을 던지며 활기를 불어넣자 가족의 공간 구석구석 손주들의 웃음과 장난으로 가득 찬다. 문을 툭치면 손주들의 웃음소리가 떨어져 나올 것만 같다. 학교 다니는 손녀는 머무는 기간이 짧아 집에서 쉬고 손자만 예전에 다니던 어린이집에 들어갔다. 아침 8시 반 손자를 보내고 나면 손녀는 어김없이 우리 집으로 달려와 아파트의 작은도서관으로 가서 책을 읽으며 지낸다. 어린이집에서 돌아온 손자가 합류하면 조용하던 집은 금세 시끌벅적해지고 정신이 없지만 바라보는 눈길은 사랑스럽기만 하다.


아파트 도서관에서 책을 보는 손주 ⓒ

아랫집에서는 ‘늘 조용하던 윗집이 왜 이렇게 소란스러워졌지’라며 의아해하겠지만 어쩌랴 잠시 눈을 찔끔 감을 수밖에. 아이들이 뛰어다니며 깔깔거리는 웃음소리에 마음이 누그러진다. 아내는 손주들의 그 활기찬 모습을 소중히 여기며 너무 엄격히 하지 말라며 감싼다. 그렇게 온 집안을 난장판으로 만들며 신나게 놀던 손주들이 어느새 두 달이 이라는 시간이 흘러 다시 떠날 날이 다가왔다. 돌아가기 얼마 전이었다. 외출 후 돌아와 보니 대문에 겨우 익힌 한글로 삐뚤삐뚤하게 쓴 ‘제발 조용해 주세요. 너무 시끄러워요. 그런데 너무 기분 나빠 하지 마세요’ 라는 메모가 붙어 있는 것이 아닌가. 자기 이름을 겨우 쓰는 우리 손자의 글씨 같았다. 그동안 꽤 시끄러웠던 모양이다. 아랫집 사람들이 ‘언제나 조용해질까’ 하며 오랫동안 참다가 아이를 시켜 쓴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유머러스한 일침이 다정하게 다가와 미소를 짓게 한다. 다행히 떠날 날이 머지않아 조심하도록 애써본다.

집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모습 ⓒ

아내는 손주들이 떠나기 며칠 전부터 아쉬움에 젖어 이것저것 챙기느라 분주하다. 딸네 가족은 이번엔 해외에서 3년을 살아야 한다며 살던 집을 정리하고 대부분 가구와 가재도구는 배로 보내고 당장 필요한 물건들은 꼼꼼히 챙긴다. 가방과 상자로 포장하고도 부족해 큰 이민 가방까지 가득 채운다.


출국하기 위해 가방을 챙겨놓고 시무룩하게 앉아 있는 손주 ⓒ

지난번 귀국할 때는 딸 혼자 손주들을 데리고 오느라 고생했지만, 이번에는 온 가족이 떠나는 길이라 짐은 많지만, 사위가 함께라 든든하다. 대구에 있는 사돈 내외도 손주들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고 먼 길을 찾아왔건만, 손녀는 친구 만나러 나가버려 겨우 몇 시간밖에 함께하지 못했다. 할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기보다는 벌써 친구들이 더 소중해진 듯하여 서운함이 남았을 것이다. 그 많은 짐을 딸과 사위 둘이 옮기기 벅찰 것 같은 데다 손주들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은 마음에 공항까지 함께 나섰다. 내리사랑이 아니겠는가. 아쉬움은 우리만인지 딸 가족은 짐을 부치고 시간이 넉넉함에도 이내 들어가 버린다. 계속 곁에 머물며 이별의 정을 나누는 것보다는 오히려 담담하게 떠나는 것이 낫다는 걸까.

출국하기 전 인천공항에서 손주들과 포즈를 취한 작가 내외 ⓒ
떠나기 전 인천공항에서 즐거운 포즈를 취한 손자와 작가 ⓒ

훌쩍거리는 아내를 달래며 식당에서 아침을 먹은 다음 공항버스를 타고 돌아오는 내내 마음은 가라앉은 채 좀처럼 풀리지 않는다. 손주와 딸네 가족이 있는 동안 이것저것 챙기느라 바빴던 아내의 마음속에는 이제 허전함이 가득한 모양이다. 딸네 가족은 벌써 도착해서 짐을 정리한다고 부산한데 아내만 온종일 침대에 누워 우울해한다. 흐트러진 집안을 정리하고 과일 한 상자를 들고 아랫집 벨을 눌렀다. 아기를 안은 젊은 엄마와 할머니가 나왔다. 그동안 손주들이 와서 시끄럽게 한 것에 대해 사과의 인사를 했다. 손주들의 소란으로 갓난아기의 잠을 방해한 것 같아 미안한 마음이다. 페이스톡으로 전해지는 손주들의 모습 속에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이제 안중에도 없는 듯하다. 아내도 정신을 차리고 예전처럼 하루하루 바쁘게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다. 곳곳에 묻어있는 손주들의 흔적과 그 모습을 회상하면 눈은 실처럼 작아지고 입꼬리가 올라간다. ‘손주는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 라는 말이 있다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하다.

할머니와 손녀가 즐거워하는 모습 ⓒ

자식을 키우던 시절이 떠오른다. 힘들기도 하고 부모의 욕심으로 혼낸 일도 있었지만 그래도 잘 따라 주었다. 이제 손주는 딸과 사위에게 맡기고 우리는 그저 예뻐하고 격려해 주면 그만이다. 두 달 간의 손주들과의 동거는 시간의 끝자락에 매달려 있었다. 짧은 시간이라 떠나보내는 아쉬움과 여운만 남는다. 왜 자식과 손주와의 관계는 이렇게 다를까. 어쩌면 그것은 핏줄의 끌림을 대대로 이어가기 위한 신의 짓궂은 장난 같은 것은 아닐런지. 언제 또 만날 수 있으려나 벌써 기다려진다.


조남대 작가ndcho5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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