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발 통상압박에 ‘한미 공동전선’ 구축 한목소리
“기업들 전시상황”...정부, 관세 협상+지원책 병행 약속
법 정비 없인 협력 한계…“MRO 등 제도적 뒷받침 시급”
트럼프발 관세 공세가 본격화되면서 한국과 미국이 인공지능(AI) 반도체, 조선·방산, 에너지 분야에서 실질적인 산업 협력 채널을 구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산업계는 미국의 자국 중심 통상 정책이 심화되고 있는가운데 기술·투자 연계를 통해 공동 전략을 수립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한상공회의소와 한미협회는 15일 서울 중구 대한상의에서 ‘제5 회 한미 산업협력 컨퍼런스’를 열고 AI 반도체, 조선·방산, 에너지 분야의 협력 해법을 제시했다. 행사에는 최중경 한미협회 회장 겸 국제투자협력대사, 박일준 대한상의 상근부회장, 박성택 산업통상자원부 제1차관, 제임스 킴 주한미국상공회의소 회장, 마크 메네즈 미 에너지협회 회장(전 트럼프 1기 에너지부 차관), 로버트 피터스 헤리티지 재단 선임연구원 등 120여명이 참석했다.
이날 참석자들은 정권 교체와 무역 불확실성에 흔들리지 않는 협력 동맹이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당초 9일부터 상호관세를 전 세계에 부과하겠다고 밝혔으나 다시 90일 유예를 선언하며 협상에 나섰다. 하지만 품목과 강도, 대상국을 둘러싼 정책 변화가 잦아 산업계의 혼선은 여전한 상황이다.
이에 박일준 대한상의 부회장은 “자유무역 체제가 균열을 일으키는 가운데 단순한 관세 협상을 넘어 양국 간 전략 산업 협력이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이라며 “AI, 방산, 에너지 산업은 협력 재력이 가장 큰 분야”라고 강조했다.
정부도 산업 현장의 어려움에 공감하며 협상과 병행한 산업 지원을 약속했다.
박성택 산업통상자원부 제1차관은 “상호관세 유예로 일부 숨통은 트였지만 자동차·철강·반도체 등에 대한 품목 관세는 유효하다”며 “중소·중견기업들이 전시 상황에 준하는 위기를 겪고 있는 만큼 정부는 긴급지원 대책과 함께 실질적 협상을 병행하겠다”고 밝혔다.
AI 반도체, 기술 연계 확대…GPU·데이터센터 협력 제안도
이날 산업계가 가장 먼저 주목한 분야는 AI 반도체였다.
김창욱 BCG MD파트너는 “미국의 파운데이션 모델을 한국이 활용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야 한다”며 “그 대신 미국 빅테크가 한국에 데이터센터를 짓고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임대하는 방식의 상호 투자 협력도 가능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마이크 예 마이크로소프트 아시아 총괄은 “트럼프 2기 정부가 규제 완화를 기반으로 AI 투자를 가속할 가능성이 높다”며 “한국은 고대역폭메모리(HBM)와 반도체 제조 역량을 갖춘 파트너”라고 강조했다. 이어 “미국은 플랫폼에, 한국은 응용 서비스에 강점을 갖고 있어 상호보완적 협력이 유효하다”고 설명했다.
마틴 초르젬파 피터슨국제경제연구소 선임연구원도 “현재 최첨단 파운데이션 모델 학습 분야는 미국과 중국 간 양자 구도”라며 “한국은 자체 고도화보다 활용·서비스화 경쟁력을 키우는 방향이 효율적”이라고 조언했다.
조선·방산 “MRO는 시작...제도 정비 없이 확장 한계”
조선·방산 분야에선 미 해군의 함정 노후에 따른 유지·보수·정비(MRO) 협력이 가장 현실적인 돌파구로 꼽혔다.
정우만 HD현대중공업 상무는 “미 해군이 30년간 360여 척을 건조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지만 현실적 어려움이 크다”며 “한국은 우수한 인프라를 갖춘 동맹국으로서 단기적 갭필러부터 중장기 건조 협력까지 가능하다”고 말했다.
김대영 한국국가전략연구원 군사전문 연구위원은 “한화오션이 미국 군함을 정비하는 현장을 직접 확인했는데, 이제는 한국이 미국에 실질적인 기여를 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고 느꼈다”며 “MRO뿐 아니라 장비 정비 분야까지 협력을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홍석준 한화에어로스페이스 전무는 “방산 분야에서 미국은 대량 생산이 가능한 한국의 체계 구축이 필요하고, 한국은 미국의 첨단기술과 결합해 글로벌 방산 시장에서 입지를 넓혀야 한다”고 진단했다.
다만 참석자들은 존스법, 번스-톨레프슨법 등 미국 내 법제도가 해외 건조를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있어 제도적 장벽 해소가 선결돼야 한다는 데 한목소리를 냈다.
문근식 한양대 특임교수는 “한미 간 국방 상호군수조달협정(RDP)을 조속히 체결해야 한다”며 “지금까지 한국은 무기 수입에만 집중됐지만 미국에 수출할 수 있는 기반도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에너지 “LNG 수입 확대, CCS·수소 공동 대응해야”
에너지 분야에서는 액화천연가스(LNG)·청정수소·원전의 협력 방안이 논의됐다.
마크 메네즈 미국에너지협회 회장은 “한국의 탄소 감축 경로상 LNG 수요는 당분간 유지될 수밖에 없다”며 “미국산 LNG 수입 확대가 통상 갈등을 완화하는 해법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주영근 포스코경영연구원 수석연구원도 “미국이 2030년까지 LNG 수출량을 2배 이상 늘릴 계획이고 가격 조건도 과거보다 유리해졌다”며 “LNG 수입과 연계한 탄소포집·저장(CCS) 협력도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청정수소와 관련해 유승훈 서울과학기술대 교수는 “2028년부터 국내 청정수소 발전이 시작되지만 국내 생산은 어렵다”며 “미국·중동 등에서 수입이 불가피한 만큼 올해부터 관련 계약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지호 두산에너빌리티 팀장은 원전 협력에 대해 “미국은 2035년까지 35GW 규모의 원전을 도입할 계획”이라며 “AI 확산에 따른 전력 공급 수요를 고려하면 소형모듈원전(SMR) 등 한국형 모델과의 협력이 확대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