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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한도전 정신’ 조오련…부드럽게 굽이쳐 흐르다


입력 2009.08.05 14:15 수정        

거듭된 좌절에도 ´무한도전´ 극복 의지

불굴의 도전정신 애도 물결 속에 넘실

안 된다는 말에 오히려 더 힘이 솟고 도전이 있어 행복했던 조오련은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나갔다.

평생을 도전으로 살았던 ‘아시아의 물개’ 故 조오련(57) 씨가 4일 심장마비로 생을 마감했다.

고인은 대한해협 횡단 30주년을 맞는 2010년 또다시 대한해협 횡단에 도전하기로 결심했었다.

수영 인생의 마지막을 걸고 온몸을 던지겠다던 고인은 도전을 실행에 옮기지 못했지만, 많은 국민들의 가슴에 그의 도전정신을 새기고 떠났다. 도전이 있어 행복했던 고인의 삶은 그야말로 파란만장했다.


수영에 도전한 겁 없는 아이

중학교 1학년 때 우연히 수영 경기를 본 조오련은 자신이 우승자 보다 낫다고 생각하며 선수가 되기로 결심했다. 고향 해남에서 자연스럽게 수영을 배웠던 그가 처음 수영에 도전하게 된 순간이다.

조오련은 해남고 1학년 때 자퇴서를 내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갔다. 구두닦이, 간판집 점원일 등을 하며 끼니를 때운 그는 국내 유일의 실내 풀이 있었던 YMCA 수영장에서 수영 실력을 갈고 닦았다.

이듬해 전국체전 서울시 예선전에서 재학 중이 아니란 이유로 ‘대학·일반부’로 출전했다. 수영복이 없어 사각팬티를 입고 나간 자유형 400m와 1500m를 석권하며 비로소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이를 계기로 양정고에 스카우트 됐고 태극마크도 달게 됐다.


한국 수영 한계에 도전하다

조오련은 양정고 2학년 때였던 1970년 방콕 아시안게임에 출전, 자유형 400m와 1500m에서 우승하며 2관왕에 올랐다.

수영 불모지나 다름없던 한국의 수영 역사를 개척한 그는 2년 뒤인 1972년 뮌헨올림픽에서도 자유형 400m와 1500m에 도전했지만 예선 탈락해 세계의 벽을 실감했다.

하지만 스물 둘이던 1974년 테헤란 아시안게임에서 같은 종목에서 또 2관왕에 올라 ‘아시아의 물개’로 등극했다. 수영선수로서 ´환갑´에 가까운 26세 나이로 출전한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 타 종목인 접영 200m에서도 동메달을 따내는 쾌거를 이룩했다.

조오련은 현역 시절 끊임없이 자신의 한계기록을 넘어섰다. 특히, 배영 100m와 평영 100m, 200m를 뺀 모든 종목에서 통산 50개의 한국신기록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 수영의 상징이다.


불가능에 도전, 대한해협·도버해협 횡단

1978년 방콕 아시안게임을 끝으로 은퇴한 조오련은 도전을 멈추지 않았다. 그는 1980년 최초로 대한해협을 횡단하며 한국인의 위상을 드높였다. 1972년 일본인 다카시마 쇼지가 도전했다가 실패했던 것이기에 감동을 더했다.

2년 후엔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도버해협을 건넜다. 현지 가이드가 체재비를 몽땅 갖고 달아나는 치명적인 상황에서 달성한 위업이었다.

쉰 살이 넘어도 그의 도전은 계속됐다.2003년 한강 600리 종주, 광복 60주년인 2005년엔 두 아들(조성웅, 조성모)과 함께 18시간 만에 울릉도와 독도 사이를 횡단했다. 지난해에는 독도 주변을 33바퀴 헤엄쳐 도는 ´독도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계속되는 좌절, 끝없는 도전으로 이기다

조오련은 인생마저 파도처럼 너울이 심했다.

은퇴 뒤 자신의 수영장 마련을 위해 아내가 하는 봉제업에 손을 댔다가 재산을 날렸고, 1985년에는 교통사고로 얼굴과 오른팔이 찢어지는 중상을 입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1989년 ‘조오련 수영교실’을 열며 사고와 실패를 딛고 제2의 수영인생을 시작했다.

2001년에는 전 부인과 사별하며 세상에 대한 의욕을 잃고 오랫동안 술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그는 좌절을 끝없는 도전으로 이겨냈다. 2003년 한강을 종주하고 2005년 울릉도-독도 횡단, 지난해 독도를 33바퀴 도는 ‘독도 프로젝트’를 성공해냈다.

사별의 아픔을 이겨낸 그는 지난 4월18일 다시 찾아온 인연과 인생의 마지막을 함께하기로 하고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내년 대한해협 2차 횡단을 결심하고 제주도에 차릴 캠프를 준비했지만 훈련비 후원이 쉽지 않아 마음고생도 했다.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도전이 있어 행복했던 조오련

박태환(20·단국대)이 한국 수영의 역사를 새로 썼다면 조오련은 한국 수영의 개척자라고 할 수 있다. 30여년 전 한국 수영에는 박태환보다도 더 큰 존재였다.

강하고 모험적인 성격에 뚜렷한 주관 때문인지 평생 국가대표 지도자를 하지 못했다. 안 된다는 말에 오히려 더 힘이 솟고 도전이 있어 행복했던 그는 자신과의 외로운 싸움을 계속해나갔다.

평생을 도전하며 살았던 그는 끝내 마지막 도전이었던 대한해협 재 횡단을 보여주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도전정신은 죽어서까지도 여전히 국민들의 가슴 속을 헤엄치듯 넘실거리고 있다.[데일리안 = 이광영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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