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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고라 광장에 시조 영웅들의 동상 세운 숨은 뜻은...


입력 2015.04.26 09:10 수정 2015.04.26 09:42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박경귀의 ad Greece 51>아테네의 자부와 연대의식 심어주다

고대 그리스 문명은 유럽 문명의 시원이자 인류 문명의 원천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창조해낸 독창적인 문화와 문명의 자취는 숱한 고전과 유물, 유적으로 고스란히 우리에게 남겨졌습니다. 여기엔 그리스의 12신과 영웅은 물론 현인과 보통사람들의 희로애락이 담겨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의 열광과 환희, 고통과 좌절로 점철된 뜨거운 삶의 궤적이기도 합니다. 그리스 역사문화 탐방은 그리스 고대 문명과 영욕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신화기행이자 미학기행입니다. 오늘날 혼돈에 빠진 우리의 삶을 반추하고 새로운 지혜를 탐색하는 ‘나를 찾는 여행’이기도 합니다. 무엇을 발견하느냐는 각자 자신의 몫입니다. 열린 눈, 열린 마음으로 함께 떠나보시지요. ad Greece!!< 편집자 주 >

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
그리스 정치 1번지, 아테나이 아고라

아테나이의 아고라는 그리스 정치 1번지이자, 민주주의의 심장이었다. 아테나이가 위기에 처했을 때 장군들, 즉 스트라테고이(Strategoi)는 민중을 대상으로 단결을 호소했다. 동맹국의 사신이 오면 아고라나 아고라 맞은편 언덕에 있는 프닉스(Pnyx)에서 민회가 열리고 대중들에서 용무를 고하고 동의를 구하기도 했을 것이다. 아고라는 이렇듯 신성한 정치의 공간이었다.

따라서 미성년자는 이곳에 함부로 출입할 수 없었다. 여성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성들은 집안에서 생활하는 것이 미덕이었으므로 아고라에 있는 상점에서 장을 보는 것도 남정네들의 일이었다. 그러니 여성들이 아고라로 외출할 일이 없었다.

아고라는 시민들의 휴식공간인 동시에 정보 교류의 장이었다. 따라서 아고라에 오면 국가의 대소사나 도시의 갖가지 소문을 쉽게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아테나이 시민들이 국가의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갖는 것은 권장되는 미덕이었다. 따라서 국가의 일에 무관심한 사람은 당연히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아고라에 드나들면서 국가의 대소사에 대한 소식을 듣는 것도 시민들의 정치 참여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물론 아고라는 시시콜콜한 수다를 떨면서 빈둥거리는 사람에게 적합한 공간이기도 했다. 또 할 일 없이 한가하게 산책하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약속장소이기도 했다. 아고라는 편안하고 친숙한 시민의 광장이자 만남의 장소였던 셈이다. 아고라에는 이런 용도에 적합한 주랑들이 여럿 있었다.

아케이드 기능을 한 동쪽의 아탈로스 주랑이외에 아고라 북동쪽에는 채색 주랑(Stoa Poikile)이 있었고, 남쪽 구역에는 중앙 주랑이 있었다. 채색 주랑을 거닐며 철학을 논했던 제논과 그를 따르던 사람들이 스토아학파로 불린 것도 여기서 유래된다.

지금 채색 주랑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고, 중앙 주랑은 주춧돌만 남아있다. 중앙 주랑은 매우 큰 건물이었다. 길이가 147미터에 이르고 너비가 17.5미터에 달했다. 이 건물의 북쪽 회랑은 아고라를 동쪽에서 서쪽으로 가로지르는 지름길로 활용되기도 했다. 안타깝게 기원 후 267년에 게르만 족의 일파인 헤룰리(Heruli) 족이 침공하여 불을 질러 파괴했다.

아고라 남쪽에 있던 중앙 주랑터이다. 주춧돌만 남았다. 이곳의 주랑 그늘에서 여름의 뜨거운 땡볕을 피했을 것이다. ⓒ박경귀

중앙 주랑이 시작되는 동편에서 뒤로 바라 본 모습, 바로 뒤에 성 아폴스톨루 성당이, 그 뒤로 아크로폴리스가 보인다. 깎아지른 듯 가빠른 아크로폴리스의 북벽이 인상적이다. ⓒ박경귀

중앙 주랑의 서편의 앞에 있던 시민 행정사무소 터이다. 의사당과 톨로스 맞은편에 있었고 일반 아테나이 시 행정을 담당했던 일반 행정관들이 활용했던 공간으로 추정된다. ⓒ박경귀

이렇듯 아고라가 아테나이 사람들이 자연스럽게 많이 모이고, 하루에 한번쯤 거쳐 가는 장소이다 보니 이곳에 주요 관청과 신전이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관청은 아고라의 서쪽에 일렬로 세워졌다. 헤파이토스 신전 앞을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작은 아폴론 신전과 제우스 주랑, 바실레우스 주랑이 있었다. 왼쪽으로는 민회의 상임위원회 성격인 평의회 의원들이 회합을 갖는 평의회 회관(Bouleterion)과 문서보관서인 메트론(Metroon), 외빈을 접대하는 영빈관 성격의 둥근 건물 톨로스(Tholos)가 있었다. 그 왼쪽으로 장군단(Strategeion) 건물과 그곳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감옥 터가 있었다.

헤파이토스 신전 앞쪽에 있던 작은 아폴론 신전의 터전이다. 아폴론은 아테나이의 왕이 된 이온(Ion)의 아버지였다. 기단의 흔적만 남아있다.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작품 ‘이온’은 아테나이의 왕 에렉테우스의 딸 크레우사가 아폴론과 사랑을 나누어 낳은 자식 이온을 버렸다가 델포이에서 상봉하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박경귀

제우스 주랑의 기단 유적, 건물은 흔적이 없고 기단의 일부만 남았다. ⓒ박경귀

민주정을 채택한 아테나이의 국가 통치기구는 크게 세 개의 집단으로 나누어졌다. 행정권을 담당한 9명의 아르콘(Archon), 전 시민이 참석할 수 있는 민회와 10개 부족의 대표 500명으로 구성된 평의회, 그리고 군대를 지휘하는 10명의 스트라테고이가 그들이다. 왕이나 참주를 허용하지 않았던 아테나이인들은 시민의 대표로 구성된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한 셈이었다.

아테나이의 행정관은 모든 시민 가운데에서 무작위 추첨으로 선발되었다. 하지만 특별한 역량과 경륜이 요구되는 중요한 직책인 아르콘과 스트라테고이 만큼은 시민 가운데서 선출했다. 모든 시민에게 평등한 공무담임권을 주어 일반 행정관에 취임할 수 있도록 했지만, 국가의 중책은 특출한 재능을 갖춘 사람을 선출하는 지혜를 발휘한 것이다.

아르콘과 장군단 제도를 운영하는 것은 나라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 어느 나라이든 공통적으로 민회나 민회의 상임위원회 성격의 블레(Boule), 즉 평의회가 국가의 중요한 의사결정 기구 역할을 했다. 고대 도시의 유적을 답사하다보면 대부분 아고라의 가까운 곳에 있던 블레의 회의장인 블레우테리온(Bouleterion)의 유적을 자주 확인할 수 있다. 블레우테리온은 오늘날 의사당에 해당되는 것이다.

아테나이의 평의회 의사당인 불레우테리온은 사각의 큰 복합 건축물로 기원전 6세기 초에 건축되었다. 평의회 의원들은 매일 이곳에 모여 아테나이의 대소사를 의논했다. 특히 전 시민이 참여하는 민회, 즉 에클레시아(Ekklesia of the Demos)에 상정할 안건을 선정하였다. 소크라테스 역시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평의회 의원에 선임되어 일정기간 활동한 기록이 있다. 아테나이 시민들은 누구나 각 부족이 순환하여 맡았던 평의회 의원이 될 수 있었다.

아테나이의 평의회 의사당 기능을 했던 블레우테리온이 있던 터전이다. 건물 기초의 일부만 남았다. ⓒ박경귀

블레우테리온의 추정 복원 모습, 정면이 도리아식 기둥으로 이루어졌다. ⓒ박경귀

아테나이의 블레우테리온의 내부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고대 그리스 블레우테리온 가운데 가장 보존 상태가 양호한 소아시아 지역의 프리에네의 유적에서 볼 수 있는 형태의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다만 아테나이의 경우 프리에네보다 도시 규모가 컸고 평의회 의원이 500명이었으므로 의사당 시설도 다소 컸을 것이다. 프리에네 유적을 보면 의사당의 의원 배치 구조가 양쪽에서 마주보도록 되어 있고 가운데에 연단이 설치되었다. 영국 의회의 의원석 배치 방식 또한 마주 보도록 되어 있는 것을 보면 고대 그리스 의사당의 구조를 모방한 것이 아닌가 싶다.

소아시아에서 번성했던 프리에네(Priene)의 블레우테리온 유적,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다. 가운데에 연단이 있고, 의원석은 ㄷ자 형태의 대리석 계단으로 조성되었다. ⓒ박경귀

프리에네의 민회 의사당 역할을 한 블레우테리온 유적이다. ⓒ박경귀

프리에네의 민회 의사당 역할을 한 블레우테리온의 추정 복원 그림이다. ⓒ박경귀

블레우테리온 앞 대로에는 아주 중요한 동상의 거리가 조성되었다. 아테나이의 10개 부족의 시조 영웅들의 청동 조각상이 있었다. 이 영웅들은 에렉테우스, 아이게우스, 케크롭스 등 전설적인 영웅들이었다. 이 10명의 영웅들은 부족민을 혈연으로 대표하는 인물은 아니었다. 그리스 민주주의를 한 단계 진화시킨 클레이스테네스(Kleisthenes)의 기획에 의해 탄생된 인위적인 인물이었다. 이런 영웅들을 인위적으로 만든 부족의 영웅으로 끌어옴으로써 영웅들마다 새로운 부족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도록 한 셈이다.

특히 아고라의 관청 거리 앞에 영웅 상을 조성한 것은 특별한 정치적 목적이 있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기원전 510년에 당시 참주였던 히피아스(Hippias, 재위 BC 527~510)를 몰아내고 민주정의 기틀을 다졌다. 그는 기원전 508년에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한다. 우선 다시는 참주가 등장하지 못하도록 아테나이 시민들이 위험인물을 사전에 제거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었다. 도편추방제(ostracism)가 바로 그것이다.

그는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시민들에게 평등한 참정권을 부여하기 위해 그동안 아테나이를 실질적으로 지배했던 4개 부족의 혈연 중심체제를 해체시킨다. 수도 아테나이를 포함하여 농촌 지역인 아티케 전 지역을 지리적으로 구획된 10개의 구역으로 나누고 인위적으로 10개의 부족 단위로 설정했다. 그리고 이 10개의 부족에서 각각 50명씩 대표를 뽑아 500명의 의원이 참여하는 평의회를 구성하도록 했다.

이는 근본적으로 가문과 씨족이 중심이 되었던 4개 부족의 정치적 결정권을 민중(Demos)를 기반으로 평의회로 이관하게 만든 획기적인 조치였다. 이는 클레이스테네스의 탁월한 안목에 의한 결정이었다. 이를 통해 아테나이가 민주주의를 발전시킨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클레이스테네스는 이렇게 재편된 10개 부족에게 새로운 소속감을 심어주고 아테나이 시민들의 연대의식을 고취하기 위해 10명의 시조 영웅들의 조각상을 만들어 아테나이 시민들이 가장 많이 왕래하는 관청 가 대로에 시설한 것이다. 광화문 광장에 세종대왕 동상과 이순신 장군 동상을 세워 국민들의 추앙을 받도록 하고 있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이곳은 평의회와 톨로스, 장군단의 청사로 통하는 도로이고 동상 아래의 벽면에는 국가의 모든 법령과 포고가 게시되는 곳이었으므로 시민들은 자연스럽게 이 영웅들은 대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각종 평의회 회의 참석을 위해서 또는 아고라에 볼 일이 있어 이곳을 지나는 시민들은 자기 구역의 시조 영웅을 올려다보며 다시한번 뿌듯한 자부심을 느꼈으리라. 클레이스테네스는 이러한 상징 정책을 통해 새로운 정치 세력을 안정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지금 시조 영웅 상들은 사라졌고, 동상 대좌를 둘러쌓던 기둥의 일부와 대좌의 기단 일부가 남아있다.

시조 영웅 상이 있던 대좌를 보호하기 위해 시설된 대리석 기둥들이다. ⓒ박경귀

시조 영웅 상의 추정 복원도이다. 동상 아래는 각종 법령과 포고를 게시하였다. ⓒ박경귀

시조 영웅 상을 받치던 대좌 기단의 일부이다. ⓒ박경귀

영빈관 역할을 한 둥근 건물 톨로스가 있던 자리이다. 둥근 지반 흔적만 남았다. ⓒ박경귀

글/박경귀 사단법인 행복한 고전읽기 이사장·한국정책평가연구원장(kipeceo@gmail.com)

박경귀 기자 (kipeceo@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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