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친박 남자’ 정진석, 유승민 전철 밟나
친박, 레임덕·여권 원심력 우려 정진석에 경고
정진석 궤도 이탈 시 ‘찍어내기’ 현실화 될듯
새누리당 원내사령탑으로 선출된 지 18일로 열닷새.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고립무원의 처지에 빠졌다. 정 원내대표를 원내대표직에 오르게 한 것도, 리더십에 큰 상처를 입힌 것도 친박계다. ‘식물 원내대표’로 전락했다는 비난이 나오면서 그가 새누리당 전 원내대표인 유승민 의원의 전철을 밟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친박계의 경고가 잇따르는 상황에서 정 원내대표의 궤도가 어느 쪽으로 향하느냐에 따라 새누리당의 혁신 시계의 가동 여부도 판가름 날 것으로 보인다.
정 원내대표는 현재 칩거에 들어간 상태다. 광주에서 열린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 참석 후 서울로 올라오려던 계획을 돌연 변경, 자신의 지역구인 공주로 향했다. 친박계의 ‘정진석 흔들기’와 비대위-혁신위 구성을 둔 계파 갈등이 폭발하면서 정 원내대표의 고심도 깊어졌다. “상임전국위나 전국위가 무산된 의미가 뭔지 좀 파악을 해보고 제 나름대로 평가를 해봐야겠다”며 대응책을 숙고키로 했다. 담담하게 얘기했지만, 정 원내대표의 내상은 이루 말할 수 없이 깊다.
당초 친박계의 정 원내대표 흠집내기는 예상되지 못했다. 정 원내대표 선친인 정석모 전 내무부 장관은 박정희 대통령 재임 시절 활동했고, 정 원내대표가 이명박 정부에서 정무수석에 발탁된 것도 박근혜 대통령과 가까운 사이라는 점이 반영됐기 때문이다. 특히 박 대통령은 한나라당 대표 시절인 2008년 무소속이던 정 원내대표가 입당하자 “큰 인재를 얻었다”며 환영 논평을 내기도 했다. 정 원내대표가 지난 3일 당선된 것도 친박의 물밑 지원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얘기가 돌았다. 원내대표단도 친박계 일색으로 꾸려졌을 때 ‘보이지 않는 손’이 다시 새누리당을 장악하는 것 아니냐는 말도 나왔다. 이 때문에 정가에서는 친박계에 의한 정 원내대표 내상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친박계는 정 원내대표의 리더십 부재를 이유로 들며 자신들의 집단 행동을 정당화하고 있다. 홍문종 의원은 이날 KBS 라디오에서 “좀 더 리더십을 발휘하고 미리 소통하고 당내 협치를 이뤘다면 이렇게까지 문제가 불거지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했고, 김태흠 의원도 같은 날 MBC 라디오에서 “정 원내대표가 충분한 당내의견 수렴 절차도 없었고 급조하듯이 편향적으로 인선해 당내 갈등을 야기한 부분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면서 “(비대위-혁신위 인선에 대해) 전권을 위임했다고 해도 독선적으로 하는 건 아니지 않느냐”고 비난했다. 김 의원은 “사과하고 백지에서 시작하든가, 아니면 본인이 어려워서 못하겠다고 스스로 사퇴를 하든가 두 가지 중에서 결정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비박계는 정 원내대표가 과거 유 의원의 전철을 밟는 것 아니냐는 우려다. 청와대가 선제 공격을 하고 친박계가 지원하는 흐름이 이번 사태와 비슷하다는 분석이 나오면서다. 김성태 의원은 이날 MBC 라디오에서 “자기네들(친박계)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해서 정 원내대표가 비대위원장을 맡아야 되느냐, 원내대표를 사퇴해야 하느냐, 본인이 판단할 문제다, 이렇게 하는 것은 유 전 원내대표의 경우 결국은 불명예스러운 하차, 새누리당의 정당민주주의가 크게 훼손되는 모습이 국민에게 얼마나 가슴 아프게 여겨졌냐”며 ‘유승민 파동’을 상기시켰다.
유 의원은 원내대표 당시 수평적 당청관계를 내세우며 여야 합의로 국회법 개정안 처리에 앞장섰다. 청와대는 이에 위헌 소지를 제기하며 반발했고 박 대통령에 ‘배신의 정치’로 낙인 찍혔다. 친박계는 즉각 유 의원 책임론에 불을 붙여 사퇴를 이끌어냈다. 이후 유 의원은 새누리당 내에서 야인처럼 지내다 4·13 총선을 앞두고 공천 파동을 겪으며 깊은 내상을 입었다. 그는 현재도 박 대통령과 친박계로부터 ‘반동분자’ 취급을 받고 있다.
정 원내대표를 둘러싼 이번 사태는 청와대의 선제 공격은 보이지 않았지만, 정 원내대표가 지난 15일 전당대회를 관리할 비대위에 대다수 비박계를 임명하고 혁신위원장에 비박계 중 ‘강성’으로 꼽히는 김용태 의원을 내정하면서 청와대의 심기는 불편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한 매체에 따르면 청와대는 “혁신위가 뭘 고치겠다고 나서도 국민은 큰 관심 없을 것”이라고 평가 절하했다. 인선 당일 친박계 강성 의원들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다가 이튿날 집단 반발의 목소리를 낸 것도 이를 방증한다. 친박계의 한 의원은 본지와 통화에서 “별다른 생각이 없다”고 했다가 이튿날 초재선 기자회견에 참석해 “우물안 개구리식 인선”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친박계가 스스로 만든 ‘정진석 체제’를 부정하는 게 유승민 파동과 궤를 같이 한다는 해석이 힘을 얻고 있는 이유다. 집권 4년차 임기 후반에 접어든 박 대통령의 레임덕을 가속하면서 여권의 원심력을 키우는 결과로 이어진다는 판단에 따랐다는 것이다. ‘내부에서 총질하는 인사는 배제한다’라는 논리와도 맞아떨어진다는 말도 나온다. 국회 상황에 정통한 한 인사는 본보와 통화에서 “정 원내대표가 ‘새누리당=친박계’라는 틀을 깨려한 것을 친박계에서는 엄청난 테러라고 생각했을 것”이라며 “정 원내대표가 자꾸 궤도를 이탈하면 유 의원 같은 상황에 직면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다만 “어느 계파를 택해도 새누리당은 혼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라며 “친박계를 택할 경우 입지는 다질 수 있지만 국민 심판에 직면하고, 비박계를 택할 경우 소신은 지켰다고 평가받지만, 친박계에 의해 정치적 위상이 매우 흔들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혁신위원장을 사퇴한 김 의원은 전날 “새누리당에 민주주의는 죽었다. 그들에게 무릎 꿇을 수 없다”고 했다. 정 원내대표가 위태로운 줄타기에서 어떤 결정을 내릴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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