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러나야 할 자들은 '아름다운 뒷모습' 보이며 물러나야
권력 의지 꺽지 못하고 자리 연연하다 부끄러운 행적
‘친박’으로 불리며 권력에 탐닉했던 자들 죄 엄중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요즘 세간에서 인구에 회자되는 이형기의 낙화(洛花)라는 시의 첫 부분이다. 꽃이 떨어져야 할 때에는 미련 없이 떨어져야 그것이 “축복에 싸여” 가는 길이 되고, “열매 맺는 가을을 향하여” “꽃답게 죽는” 길이라는 내용으로 이어진다. 이 시가 갑자기 유행하는 것과 박 대통령 주변에는 어찌 이리도 사람이 없느냐는 이야기는 서로 일맥상통 하는 데가 있다. 대통령이 탄핵소추를 당했는데도, 그동안 책임 있는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들 중에 제대로 사과하는 사람도 본 적이 없고, 책임지겠다고 결연하게 나서는 사람도 본 적이 없다. 이들은 아직도 자신이 ‘가야할 때’인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옛날 우리 선비들이 갖추고자 했던 도덕률 중에 지지(知止)라는 것이 있었다. 사전적으로 정의하면 ‘분수에 넘치지 않도록 그칠 줄 아는 것’을 의미한다. 노자의 《도덕경》 44장에 있는 지족불욕 지지불태(知足不辱 知止不殆)라는 구절이 그 출처이다.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만둘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라는 뜻이다. 권력과 지위를 누리던 사람들은 가장 적당한 시기를 살펴서 그것을 내려놓고 떠나야 하며, 그렇게 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는 이야기이다.
송나라의 철학자 장재(張載: 1020~1077)는 이 지지(知止)를 잘 실천한 사람이다. 횡거(橫渠) 선생이라고도 불리는 그는 학문이 높고 강의가 명쾌하여 그의 집에는 가르침을 얻으려는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어느 날 정호(程顥), 정이(程頤)라는 형제가 그를 찾아 주역에 관한 가르침을 청했다. 그런데 장재가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 오히려 자신보다 학문의 경지가 높은 것이 아닌가. 장재는 그 순간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사람들을 향해 지금까지 자신의 강의는 잘못되었으니 모두 잊어버리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정씨 형제를 스승으로 삼으라고 했다. 이후 그는 호피(虎皮), 즉 스승의 자리를 미련 없이 빼버리고 곧장 고향인 섬서성으로 떠나 암거관천(巖居觀川)했다. 횡거철피(橫渠撤皮)라는 고사이다.
권력 의지 꺽지 못하고 자리 연연하다 부끄러운 행적 남긴 자동차 신화 '헨리 포드'
자신의 부족함을 알지 못하고 권력에의 의지를 꺾지 못하고 자리에 연연하다가 부끄러운 행적을 남긴 이들이 의외로 많다. 마땅히 책임을 지고 물러나야 할 사람들이 때를 놓친 사례 중에는 자동차 신화를 일으킨 헨리 포드도 포함된다.
그는 20세기 초 부자들의 전유물이었던 자동차를 모든 사람들이 한 대씩 가지게 하겠다는 웅지를 품었다. 디트로이트 인근에 컨베이어 벨트를 갖춘 조립라인을 세우고 모델 T라는 값싸고 실용적인 자동차를 생산함으로써 그의 꿈은 이루어졌다. 모델 T는 1908년부터 20년간 약 1천 5백만 대가 생산되어 미국 전역의 도로를 덮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세상은 변했고 소비자들의 요구는 다양해졌지만 그는 자신의 성공 레시피에 취해 세상의 변화를 외면했다. 그 결과 포드는 새로운 GM의 경영자 앨프레드 슬론에게 참담하게 패했다. 시장 1위 자리도 GM에게 넘겨주었고 경영은 점차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변화를 요구하는 목소리를 끝까지 외면했고 의사결정을 독점했다. 포드의 회생은 그가 82세 되던 해 며느리와 손자의 쿠데타로 쫓겨난 후 전개된 대대적인 개혁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그를 불통으로 이끌었던 그의 심복 해리 베네트는 인적 청산 제1호가 되었다.
정유년 새해가 시작되었다. 지난겨울 ‘이게 나라냐?’를 외치며 광화문으로 나섰던 사람들은 이번에는 제대로 된 나라를 세워보자는 기대로 새해를 맞고 있다. 그런 국민들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는 사건이 줄을 잇고 있다. 이른바 야권의 대선주자로 불리는 사람들은 저마다의 얄팍한 정치적 계산으로 조기 대선 국면에서 조금이라도 유리한 위치를 점해보려고 온갖 유치한 언행들로 국민들을 혼란에 빠뜨리고 있다.
‘친박’으로 불리며 권력의 달콤함에 탐닉했던 자들 죄 엄중
그런가 하면 아직까지는 집권 여당이라는 형식적 지위를 누리고 있는 새누리당은 더욱 졸렬한 행태를 보이고 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문제되는 것은 진지하게 ‘반성’하는 태도도 없고, 누구 하나 책임지려는 모습도 없다는 것이다. 최순실에 의한 국정농단이 대통령 혼자만의 책임일 수 없다. 국무총리와 비서실장을 비롯하여 대통령을 보필해온 사람들의 공동책임이며, 집권 여당으로 국정의 한 축을 담당하며 권력을 누려온 새누리당의 책임도 그에 못지않게 크다. 더구나 ‘친박’으로 불리며 권력의 달콤함에 탐닉했던 사람들의 죄는 참으로 엄중하다.
지난해 말 새누리당은 반성하고 환골탈태 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며 인명진 목사를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영입했다. 그런데 인 비대위원장이 ‘친박’ 핵심들을 대상으로 인적 청산을 하려 하자, 서청원 의원 등이 격렬하게 저항하고 나섰다. 당장 6일 예정이었던 당의 최고 의결기관인 상임전국위원회의 개최가 정족수 미달로 결렬 되었는데, 이 배경에 서의원 등 친박 원로들의 입김이 있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새누리당의 앞에는 총체적인 파국이 기다리고 있을 뿐 아무런 미래도 없다.
백척간두 당 회생 원한다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아름다운 퇴장' 해야
8일 인 비대위원장은 기자회견문을 통해 자신은 물러나지 않을 것이며, 새누리당의 인적 쇄신을 책임지고 마무리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정파탄의 책임이 일차적으로 집권 여당에 있고, 그 중에서도 패거리 정치를 통해 당을 사당화해온 몇 사람은 도저히 그 책임을 면할 수 없다는 지적도 했다. 그는 대통령이 탄핵 소추 중이고 국정이 파탄됐는데, “박근혜 정부의 성공을 위하여 ‘이 한 몸 헌신하겠다, 불사르겠다.’라고 공언했던 사람들이” 이제 와서 “국회의원 직을 버리라는 것도 아니고, 최소한의 책임을 지라는 것”인데 이를 거부하고 있다며 친박 핵심들을 겨냥했다.
새누리당은 이미 대부분의 지지자들을 실망에 빠뜨림으로써 백척간두의 위기를 자초했다. 자신이 속했던 당에 대한 애정이 조금이라도 남아있고, 당의 회생을 조금이라도 원한다면, 그리고 그동안 자신들을 지지했던 수많은 유권자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지금 책임지는 것이 옳다. 기왕이면 타자에 의한 인적 청산의 대상이 되지 말고 스스로 물러나는 ‘아름다운 뒷모습’을 보여주기 바란다. 억울함이 있고, 할 말이 많더라도, 갈 때는 그냥 가는 것이 아름답다.
글/허구생 단국대 교수·역사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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