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속열차 안전벨트 설치 중단한 이유는?
급제동부터 정지거리 3km 넘어 안전벨트 설치 필요 없어
핀란드 허리고정식 도입 위해 시범운영하다 백지화하기도
시속 300km를 달리는 KTX를 타다 보면 문득 드는 궁금증이 있다. ‘왜 열차에는 안전벨트가 없을까.’ 승용차나 고속버스 등에는 모든 좌석마다 안전벨트 착용을 의무화하는 것과 대조적이기 때문이다. 안전벨트는 급제동을 할 경우 탑승자가 받는 충격이나 관성력으로 앞으로 튀어나가는 등의 2차 사고를 예방하는 데 필요하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면 열차 내 안전벨트는 기술적 측면에서 효과가 없으며, 위기상황 시 오히려 위협이 될 수 있어 설치하지 않는다. 현재까지 연구된 바에 의하면 탈선·충돌 등의 대형 사고 발생시 대피·구조 등을 방해해 오히려 인명 피해를 더욱 키울 수 있다는 우려가 크다.
이에 국내를 비롯해 세계 모든 열차 좌석에는 안전벨트가 없다. 다만 핀란드에서는 1998년 발생한 유바스큘라 탈선사고를 계기로 2점식(허리고정방식) 안전벨트를 설치하고 시범 운영을 하다 설치를 중단한 바 있다.
우선 열차는 비상제동을 해도 차량처럼 급제동이 걸리지 않는다. 시속 300km의 속도를 내는 KTX 열차의 경우 급제동을 할 경우 정지할 때까지 1분 10초가 소요된다. 제동거리만 놓고 봐도 3km를 넘기 때문에 사실상 급제동에 따른 신체 피해가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실제 사람이 느끼는 감속도 역시 1.19m/s2로 차량으로 비교·설명하면 정지상태에서 2초 만에 시속 10km로 가속할 때 느끼는 정도로 미미하다. 이 같은 기술적 측면에서 안전벨트가 굳이 필요하지 않다는 분석이다.
여기에 더 큰 이유는 열차 내 안전벨트는 탈선·충돌 등의 위기상황 시 대피나 구조 등을 막아 사망 위험이 높아질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열차 사고는 승객이 차체 밖으로 튀어나가거나 머리 충격 등의 부상으로 인한 사망보다 대부분 차체가 손상, 즉 찌그러지면서 승객이 의자에 앉은 채로 압사하는 경우가 많아서다.
만약 시속 300km로 달리던 열차가 탈선해 옆으로 넘어져 미끄러지는 경우 안전 벨트를 착용한 상태에서 좌석에 앉아 있는 승객들은 어떻게 될까. 재빨리 움직이지 못해 열차가 땅과의 마찰로 찌그러지면서 오히려 목숨을 잃는 경우가 더욱 클 것이라는 예측이 크다.
김주원 코레일 연구위원은 “열차의 특성상 사고 발생 시 승객의 이탈로 인한 사망자 보다 생존공간의 유실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사망자가 월등히 많다”며 “안전벨트가 없어야 차체 손상이 덜 가는 공간으로 신속히 이동할 수 있고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다”고 말했다.
영국의 철도안전 분야의 권위 있는 기관인 철도안전표준위원회(RSSB, Railway Safety &Standards Board)도 열차의 안전벨트가 안전성을 높이기 보다는 승객의 안전을 위협할 수 있다고 경고하고 있다. 위원회는 열차 안전벨트 착용이 승객 대피나 구조를 방해해 사망자가 6배까지 늘어날 가능성이 있다고 예측했다.
RSSB가 1996년~2004년까지 영국 내에서 발생한 중대철도사고 6건에 대해 사망사고를 분석한 결과 차체 이탈로 사망한 사람은 11명인데 반해 차체 손상에 의해 발생된 사망자는 14명이었다. 하지만 생존공간이 유실된 좌석은 220석으로 만약 모든 차량에서 전 승객이 안전벨트를 착용했다고 가정하면 사망자는 88명으로 6배 이상 늘어나게 된다
다만 최근 미국과 유럽 등에서 잇단 열차 탈선사고로 인한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하면서 기차에도 안전벨트를 설치해야 한다는 논쟁이 재점화 되고 있다.
미국에서는 지난 2015년 5월 12일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 근처에서 열차 탈선사고가 발생해 8명이 사망하고 200여명이 부상당했다. 당시 미국 국가교통안전위원회(NTSB)는 안전벨트 설치 필요성에 대한 연구 검토를 착수해 지난해 5월 17일 최종 보고서를 발간했다. 보고서에는 미국연방철도국(FRA)에 안전벨트 설치에 대한 안정성 검증을 권고한 바 있다.
일각에서는 안전벨트 보다는 열차내 충격완화 설비, 비상탈출을 위한 구조개선이 더욱 필요하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주) 데일리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