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안보라며? 트럼프 사드 발언 빌미로 반미 선동
<칼럼>대전환의 시대에 들어선 한미관계 직시해야
미국 경시하며 지도력 부각시켜 대권 잡겠다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사드(THAAD Terminal High Altitude Area Defense: 고고도 미사일 방어체계) 비용을 우리더러 물라고 했다 해서 정치권과 언론들이 연일 시끄럽다. 사드는 이미 미국 주도하에 국내에 배치됐고, 곧 시험에 들어간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비용을 내놓으라면 이는 명백한 강매행위다.
그런데 문맥을 뜯어보면 트럼프가 당장 사드 값을 내놓으라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사드는 한국을 방어하기 위한 것이고, 그 비용이 10억 달러나 되는데 그걸 미국이 부담하고 있는 것을 납득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이 그것을 감당하는 게 온당하다는 뜻을 전했다는 정도의 언급으로 들린다. 아무리 사업가적 마인드가 확실한 트럼프라고 하지만 주한미군이 운영할 사드를 설치부터 해 놓고 우리더러 돈을 요구하기야 하겠는가.
그렇다고 그냥 해보는 말은 아닐 것이다. 우선 사드의 비용과 성능이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바와 같이 미국은 한국의 방어를 위해 엄청난 지원을 해 왔음을 강조하려는 의도가 느껴진다. 특히 차기 한국 정부의 담당자들이 이를 분명히 인식해 주기를 바라고 한 말일 듯하다. 아울러 내년에 있을 주한미군 방위비분담금 협상, 그리고 트럼프가 선거 때부터 강하게 불만을 표출해 온 한미FTA의 재조정(또는 재협상)에서도 미 국익 우선의 원칙을 고수할 것이라는 예고일 수 있다.
대선 기간 중이어서 후보마다, 정당마다 트럼프의 발언을 자신들의 의도에 맞춰 해석하고 평가하고 하는 것은 그럴 수도 있다고 하겠으나 너무 허풍스럽게 반응하는 것은 좋지 않다. 그 중의 한 사람과 그가 속한 정당이 집권을 하게 될 것이고, 그 정부가 앞으로 미국과 최우선적으로 안보‧국방문제를 논의해 가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몇 달 간격으로 새로이 출범하는 양국 정부가 처음부터 서로에 대한 곡해와 불신을 갖고 대해서는 곤란하지 않겠는가.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말을 미국인의 입장에서 들으면 이해 못할 바가 아니다. 그의 상인적 기질을 감안한다면 한국과의 관계에서도 미국의 국익을 앞세우는 것은 당연하다. 미국은 지구상 유일한 초강대국이다. 그들이 긴밀한 관계를 맺고 유지해야 할 상대는 세계 거의 모든 국가다. 우리에게만 유별난 관심과 우정을 가질 입장이 아니라는 상식을 먼저 재확인할 필요가 있다.
그런데도 미국이 한국과 사이에 상대적으로 특별한 관계를 유지해 왔던 것은 우리의 전략적 가치 때문이다. 2차 대전 후 세계질서가 급속히 동서 냉전체제로 전환되면서, 특히 6.25를 통해 양 세력의 군사적 대결이 현실화하면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는 급상승했다. 만약 중국이 공산화하지 않았다면 미국의 동북아 전략은 달라질 수 있었겠지만 러시아에 이어 거대 중국까지도 공산화함으로써 한국은 군사적으로 대 공산권 최전방 보루이자 교두보로서 가치를 갖게 된 것이다.
동북아의 이 같은 군사지형은 80년대 이후 가속화된 중국의 실용주의 경제정책과 91년 소련 해체 및 러시아 민주화로 근본적인 변화기에 들어섰다. 동북아의 군사적 긴장이 크게 완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자 북한은 체제의 유지 존속을 위한 자구책 마련에 나서지 않을 수 없었고 그것이 핵무기 및 미사일 개발로 나타났다. ‘저비용 고효율’ 전략으로서 선택된 것이었겠지만 이로 인해 미국은 한반도 개입정책을 완화할 수가 없게 됐다.
북한의 군사적 모험은 갈수록 도를 더해 갔고, 러시아와 중국은 과거와 같지는 않다고 해도 국제사회에서 북한 역성들기를 멈추지 않았다. 세계의 경찰, 세계의 판관을 자임해 온 미국으로서는 ‘핵 비확산’이라는 미국 주도의 세계 군사질서에 공공연히 맞서는 북한을 묵인할 수 없었고, 중국과 러시아는 설득되지 않았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직접 북한과 무장대치 중인 한국의 군사적 중요성이 여전하게 된 것이다.
당연히 미국의 한국 중시에는 다른 이유도 있었다. 대한민국은 미국의 지원 하에 미국식 제도를 근간으로 성립됐다. 그리고 6.25동란 후 20~30년 만에 세계사상 유례가 드물 만큼의 경제적 대성공을 이뤄냈다. 이는 한국인이 이룬 기적이었지만 미국에게도 자랑하기에 충분한 성공사례가 되었다. 게다가 한국은 어느새 경제는 물론 정치 군사적으로도 미국이 결코 경시할 수 없을 정도의 위상을 확립했다.
이러한 배경들에도 불구하고 중국과의 사이에 신뢰관계가 구축된다면 미국은, 적어도 한국과 관련한 군사적 부담에서는 한 발 뺄 수도 있다고 판단할 것이다. 더욱이 지난 20년간 한국에서는 반미 분위기가 예사롭지 않을 정도로 고조되어 왔다. 그걸 감내하지 않아도 되는 길은 중국만이 열어줄 수 있다고 여겨왔을 법하다. 중국이 북한의 핵 및 미사일 개발을 포기시키고 한반도 비핵화의 목표를 달성하는 데 함께 나서준다면 한반도에서의 미국의 선택지는 늘어나게 된다. 장기적인 과제이긴 하지만 북한과의 수교와 남북 등거리외교도 염두에 둘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이 점에서 누구보다 트럼프의 계산이 빠르지 않을까? 그는 일본 우익 정권과 일찍이 없었던 강력한 유대관계를 과시하고 있다. 이를 발판으로 중국에 대해서도 ‘신뢰 공세’를 펴기 시작했다. 트럼프는 시진핑 주석과의 정상회담(4월 6~7일) 이후 두 차례나 더 전화통화를 하면서 중국과 시 주석에 대한 자신의 호감과 신뢰, 양국 간의 상호 신의를 유난히 강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강력한 미‧일 동맹체제의 바탕위에 미중 신뢰까지 더해지고 이를 통해 북한 핵무기 및 대륙간 탄도미사일 개발을 포기시킬 수만 있다면 이른바 코리아 패싱(Korea Passing)이, 트럼프에게는 문제될 게 없다.
어쨌든 주변정세가 우리의 해묵은 인식과는 궤를 달리하기 시작한 느낌을 주는 게 사실이다. 우리 가운데 일부가 의사당에서, 거리에서 ‘반미’를 기세등등하게 외치는 사이에 한반도를 둘러싼 열강들의 거래관계와 계산법은 달라지고 있다. 아직은 여러 가지 조건(이를테면 ‘북한이 핵 및 미사일 개발을 포기한다면’ 하는 식의)이 전제되긴 하지만 궁극적으로 미국이 한국에 대한 군사적 보호와 지원을 거둘 수도 있다는 예측을 가능케 하는 지형변화가 느리게나마 진행 중이다.
우리도 생각과 판단, 나아가 인식구조 자체를 재점검하고 상황에 맞춰 전환시켜 나가야 할 때가 되었다. 무엇보다 미국에 대한 오해 혹은 착각을 버려야 한다. 혹 은연중에라도 ‘키다리 아저씨’ ‘아낌없이 주는 나무’로, 그게 아니면 ‘스크루지 아저씨’ ‘오만하고 욕심 많은 양키’로 미국을 인식했다면 이제라도 과감히 그런 오해를 털어낼 일이다.
미국에 대해서는 온갖 험한 말과 행동으로 반사적 대응을 하면서 중국에는 과공의 태도를 보이는 까닭이 뭔가? 미국은 우리가 어떻게 하든 한반도에서의 이익을 포기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으로 그런다면 이는 착각일 공산이 크다. 미국은 우리에게 한없이 마음씨 좋은 아저씨도 아니고, 한국을 이용해 미국의 국익만 챙기겠다는 수전노도 아니다. 다만 군사동맹을 유지하는 게 서로에게 이익이 되기 때문에 큰 목적을 위해 작은 갈등을 감수하는 사이일 뿐이다.
앞으로 미국의 트럼프 정부는 우리에게 순수 거래적 셈법을 요구할 게 뻔하다. 사업가 혹은 상인은 현실주의자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한국이든 미국이든 대통령이 최우선적으로 고려하는 것은 ‘재임기의 성과와 공적’이다. 다음 정부 또는 외교상 카운터 파트의 성공을 위해 자신의 기회를 포기하려 할 대통령이 있겠는가.
곧 대선이 치러지고 늦어도 10일 아침에는 차기 정권이 등장한다. 현재의 판세라면 이른바 ‘진보좌파 정권’이 들어 설 것 같기도 하다. 그럴 경우 미국을 비판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선명성을 과시해왔던 사람들이 대거 정권에 참여할 개연성이 높다. 공공연히 미국을 경시함으로써 자신의 지도력을 부각시키려는 정치인이 그 속에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문제는 미국 측의 대응이다. 트럼프가 “좋을 대로 하세요”라며 끈을 놔 버릴 상황도 아주 배제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파머스톤 경이 1848년 영국 의회에서 했다는 말은 지금도 유효하다. “국가에는 영원한 친구도 영원한 적도 없다. 국가이익만이 영원할 뿐이다.” 당연히 영원한 응석받이나 투정쟁이도 용인되지 않는다. 제몫은 제가 감당해야 하는 냉엄한 현실과 냉정한 계산만 있는 게 국제사회다.
미국과의 동맹관계를 포기해가면서까지 추구해야 할 가치와 이익이 있다면 그렇게 해보시라. 그게 아니라 대중용 허장성세일 뿐이라면 제발 현실감각을 가지시라. 특히 대북정책에 대해서인데, 차기 정부 담당자들은 우리가 우선적으로 고려하고 염려하고 도와야 할 대상이 북한 김정은 정권인지, 아니면 폭정에 신음하는 그곳의 2500만 동포인지를 분명히 하길 바란다. 트럼프의 언급을 “사드 값 당장 지불하라”는 압박으로만 인식하고 다투어 국민의 반미감정을 자극하기에 앞서서!
“10억 달러를 내라고 하는데도 사드배치 찬성할 거냐”라거나 “돈을 요구할 거면 사드 도로 가져가라”는 투로 트럼프의 언급에 반발하는 후보들이 있던데 그런 기개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을 막을 수만 있다면야 오죽 좋으랴.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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