쌀쌀한 바람이 겨울을 부르는 요즘, 어릴 적 꽁꽁 언 손을 녹이던 따뜻한 아랫목이 그리울 때가 있다. 내 엄마, 내 연인의 품은 아니어도 그렇게 따뜻한 온기를 느낄 수 있는 영화가 있다.
왓챠와 넷플릭스를 열며 ‘오늘은 무슨 영화를 볼까’ 생각할 때, 못 본 영화가 아니라 봤던 영화를 다시 보고 싶을 때, 배우나 감독이나 스토리가 아니라 그저 단 하나의 장면에 사로잡혀 선택할 때가 있다. 그 장면은 마치 사진처럼 마음속에 저장돼 있고, 어쩌면 그 장면은 인상적 한 컷이 아니라 영화 자체를 대변하고 응축하는 기억 그대로다. ‘세상의 끝에서 커피 한 잔’(2014, 감독 강수경, 수입 ㈜도키엔터테인먼트, 배급 홀리가든)은 그런 영화다.
미사키(나가사쿠 히로미 분)는 부모님의 이혼으로 30년 전 아버지와 헤어졌다. 기억 저편의 아버지 소식을 전한 건 경찰이었다. 아버지가 8년 전 바다에 나가 실종됐으며 살아계시지 않을 것이니 법적, 행정적 절차를 밟으라는 것. 선뜻 아버지의 빚을 떠안겠다는 미사키에게서 아버지에 관해 안고 있는 마음의 빚이 보인다. 부채와 함께, 아버지와의 추억이 담긴 바닷가 배 창고를 유일한 유산으로 받는다.
미사키는 창고를 개조해 ‘요다카 커피’라는 이름의 카페를 열고 커피콩을 볶는다. 일본 혼슈지방 이시카와현 노토반도의 한적한 바닷가, 정말이지 세상의 끝인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바닷가에 얼마나 많은 손님이 오겠는가. 하지만 정성으로 볶고 손님 취향에 딱 맞는 커피를 골라 주는 덕에 온라인 판매는 날로 성황이다. 미사키는 주로 집중해서 음미하면 깊은 맛을 느낄 수 있다는 탄자니아 커피콩을 볶는데, 영화와 닮았다. 여담으로, 요다카는 ‘쏙~ 쏙~’거리며 우는 쏙독새다. 이름에 ‘독’이 붙은 건 입을 꼭 다물었을 땐 잘 보이지 않을 만큼 부리가 작지만, 입을 벌리면 항아리 같은 크고 깊은 입속이 보여서다.
커피콩 볶는 기계와 과정이 신기하기만 한 남매 아리사(사쿠라다 히요리 분)와 쇼타(호타모리 카이세 분)는 카페 바로 위 언덕, 이제는 운영하지 않는 민박집의 아이들이다. 남매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일본영화 ‘아무도 모른다’의 아이들과 겹쳐 보인다. 쇼다는 천진난만한 막내 유키, 아리사는 어린 나이에도 엄마 노릇을 대신하는 속 깊은 첫째 아키라 그대로다. 이웃 도시 술집이 일터인 엄마 에리코(사사키 노조미 분)은 1주일에 한 번 집에 올까 말까다. 엄마가 놓고 가든 돈은 학교 월사금을 내고 동생과 먹고살기에 부족해서 아리사는 가난을 이유로 학교에서 ‘왕따’를 당하고 도둑 취급을 받는다.
궁지에 몰린 아리사는 어쩐지 마음이 가는 믿음이 가는 어른인 미사키에게 돈을 꿔 달라고 한다. “여기서 일해 볼래?”. 돈은 쉽게 빌리는 게 아니라며 일자리를 제안하는 미사키. 어른이 한 잘못을 다른 어른이 메워 주는 그 마음이, 내 아이가 아니어도 세상의 아이가 처한 곤궁에 마음을 쓰는 그 품성이 너무 고맙다. 일찍 철이 든 애어른 아리사는 주문량이 급증해 바빠진 ‘요다카 커피’에서 충분히 제 몫을 해낸다.
엄마 에리코는 미사키와 가까워지는 것을 경계한다. 처음엔 분통이 터졌다. 에리코 당신이 없는 사이 남매를 보살펴 줄 거라고 믿는 남자(나가세 마사토시 분)는 되레 아이들의 생활비를 축내고 위협이 되는 존재라고! 미사키가 당신이 없는 동안 아이들에게 보살핌과 즐거운 추억을 주고 있다고! 예쁜 얼굴이 밉게 보일 만큼 무책임하고 판단력 흐린 에리코가 미웠다.
하지만, 에리코에게도 사연이 있다.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임신을 하게 됐는데 아이의 아빠는 외면했다. 이런 게 진짜 무책임이다. 에리코는 혼자 아이를 낳았고 부족하나마 이제껏 키워 왔다.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쇼타의 생부도 마찬가지였기에, 손을 보탤 가족도 없기에 두 아이를 홀로 키우고 있을 터. 바닷가 시골 마을에서 짧은 학력에 아이가 있는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다. 마을에 관광객이 주니 민박도 안 되고 그나마 낮에는 아이를 돌보고 아이가 자는 밤이면 나가던 술집도 없어지니 대처의 술집까지 출퇴근하게 된 거다. 시외버스가 끊기는 시간에 일이 끝나니 택시비도 하루 이틀, 싱글맘 에리코에게는 너무 큰 돈이다.
미사키의 사연, 아버지에게 가지고 있는 마음의 빚은 30년 전 이혼 당시 어린 미사키가 엄마를 택해 아버지를 떠난 것이다. 이 대목에서 미사키의 인성이 보인다. 부모 이혼의 피해자라고 생각하기 십상인데, 되레 자신이 엄마를 택해 아버지가 혼자 남게 됐다고 미안해하는 사람. 내가 나와 아빠의 추억 공간에서 아빠를 기다리면 돌아오리라는 기약을 안고 기한 없는 기다림을 감당하는 사람. 이런 미사키이기에 아리사와 쇼타를 살피고 이내 에리코에게 손을 내밀고, 모든 것을 내어 줄 수 있으리라. 스포일러라 말할 수 없지만, 미사키에게는 두 번의 위기가 닥친다. 하나는 그나마 에리코와 가까워질 수 있는 계기가 되지만, 다른 하나는 기다림을 힘겹게 하는 선택의 기로로 미사키를 몬다.
다시 글의 처음으로 돌아가서. 이상하게도,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요다카 커피’ 카페가 자리한 바닷가 풍경은 마치 가본 것처럼, 추억처럼 문득문득 떠오른다. 가보고 싶어도 지금은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로 갈 수 없다. 어떤 때 떠오르나 보니, 살면서 마음에 찬바람이 불 때 세파의 고단함이 클 때 그립다. 바다는 지구의 자궁이라 했던가. 나의 기원이자 가장 평안했던 그곳을 기억하는 기억이 그 장면을, 이 영화를 자꾸 보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언제 봐도 실망감은 없다. 무엇이든 품어 줄 것만 같은 바다를 닮은 미사키가 있고, 해맑은 미소의 쇼타가 있고, 언제나 응원하고픈 아리사와 이제는 좀 행복했으면 하는 에리코가 있다. 보는 것만으로도 힐링이 되는 바닷가 풍경을 영화로 옮겨온 강수경은 대만의 감독이다. ‘온기’가 느껴지는 세상의 끝에서 커피 한 잔 함께할 날을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