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위를 압축시켜 시작하기로 한다. 윤종빈 감독의 영화다. 때는 바야흐로 ‘비스티 보이즈’가 전국 관객 71만명의 성적으로 막을 내린 후. 윤계상 하정우 윤진서 마동석이 합세해 한국영화에서 보기 드문 호스트바를 배경으로 유흥업소 종사자들의 삶과 사랑을 그렸건만 대중의 반응은 신통찮았다. 낯선 공간, 낮보다 역동적인 밤의 인생을 사는 그들의 화려하면서도 껍질뿐인 삶에 들어간 카메라는 매우 유머러스하고 적나라했지만, 관객은 즐길 준비가 돼 있지 않았다.
윤종빈 감독은 회상한다. “아, 영화를 그만두어야 하나, 생각이 많고 머릿속이 복잡했습니다”. 중앙대 연극영화과 졸업작품이자 데뷔작인 ‘용서받지 못한 자’로 국내의 찬사는 물론이고 제59회 칸국제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에 초청될 만큼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출사표를 냈던 윤 감독에겐 ‘추락’을 맛보는 경험이었을 것이다. 솔직한 태도, 리얼한 만큼 더 독특하게 느껴지는 유머는 그대로인데, 관객과 공명하지 못했다. 대중영화, 상업영화 감독으로서의 자질에 스스로 의문을 품었다.
머릿속을 비워내기 위해 윤종빈 감독은 산에 올랐다. 서울의 남쪽, 이름에 ‘악’이 들어간 대로 험한 형상을 지닌 관악산에 매일 올랐다. “마땅히 할 일도 없었어요. 걸어야겠는데, 그냥 평지를 걷는 게 아니라 좀 험한 데를 가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날마다 관악산을 찾았다.
“어느 날 관악산에서 내려오다 보니 서울대더라고요. 학교에 가니 도서관에 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도서관에 가니까 글이 쓰고 싶어졌습니다. 거기서 시나리오를 썼어요. 밤이 되면 도서관에서 나와 집으로 오면서 막걸리 한 병 사 들고 와서, 돈이 없으니까 막걸리 한 병 사 들고 와서 마시고 잤습니다. 다시 아침이면 관악산에 가고, 도서관에 가고, 글을 썼습니다.”
누구나 실패를 맛본다. 그 맛은 너무 써서 외면하고 싶고 잊고 싶다. 하지만 윤종빈 감독은 회피하지 않았다. 결국, 정면 돌파를 택했다. 군부대 내무반을 배경으로 경험이어서 현실감 있고 많은 남자의 공감대가 가능했던 ‘용서받지 못한 자’처럼, 1980~90년대를 배경으로 우리네 아버지들이 세파를 어떻게 뚫으며 살아왔는지를 거칠면서도 스타일 넘치게 그려 472만 관객의 ‘엄지 척’을 끌어냈다.
똑같이 남자들의 세계를 대담하게 표현했지만 평범한 우리와는 거리감 있는 ‘그들만의 리그’로 받아들여졌던 ‘비스티 보이즈’와는 달리, 공감과 환호 속에 대한민국을 들썩이게 했다. 영화에는 한국판 ‘대부’라는 호평, 윤종빈 감독에게는 한국의 쿠엔틴 타란티노라는 별명을 가져다준 영화. 바로,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의 탄생이다.
감독 윤종빈에게만 ‘빛’이 된 작품이 아니다. 비리 세관 공무원 최익현을 맡은 배우 최민식은 임기응변에 강하고 뻔뻔하리만큼 친화력이 좋은 ‘반달’ 역을 맛깔나게 연기했다. 최민식의 부활은 영화 ‘악마를 보았다’가 아니라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를 통해 이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물 만난 고기처럼 최민식은 대체불가의 존재감을 발산했다.
‘로비의 신’ 최익현과 손잡은 ‘주먹의 신’ 최형배, 또 다른 나쁜 놈을 연기한 하정우 역시 이 작품을 통해 ‘믿고 보는 배우’를 넘어 ‘충무로 블루칩’에 등극했다. 영화 ‘추격자’(감독 나홍진), ‘국가대표’(감독 김용화), ‘황해’(감독 나홍진) 등을 통해 기존의 배우들과 색이 다른 연기로 관객에게 짜릿한 쾌감을 선사한 하정우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를 통해 톱스타 자리를 굳혔다. 보통의 조직폭력배 보스와는 외모와 패션 스타일, 미각마저 다른 최형배는 영화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를 대표하는 이미지 자체였다.
지금 생각하면 ‘이 배우들이 하나의 영화에 나오다니’, 놀랍기 그지없게 마동석, 김성균. 조진웅, 곽도원, 김종수 배우가 야성미를 발산하며 내공을 보탰고 ‘범죄와의 전쟁: 나쁜놈들 전성시대’ 이후 승승장구했다.
기억을 더듬다 보니, 배우 황정민과 하정우가 만난 윤종빈 감독의 신작 ‘수리남’을 어서 보고 싶다는 생각이 용솟음친다. 우물에 가서 숭늉 찾지 말고 관악산은 아니더라도 매주 산에 오르며 윤종빈 감독의 감각적 이야기 전개, 생생한 캐릭터 파티, 스타일 넘치는 영상을 느긋하게 기다려야겠다. 그날은 꼭 올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