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박, 박근혜 사면 들어갔을 제목 자리가 당연한 ‘무료 접종’으로
1년 내내 나라 흔든 윤석열 사태엔 단 한마디 언급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필자는 본국 대통령 신년사 전문을 읽어 보았다.
칼럼니스트라는 직업적 의무로도 그렇고 제목이 아무래도 이상해서, 솔직히 말하면, 비판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 전문(全文)을 찾아서 일별(一瞥)해 본 것이다.
독자들은 11일 오전부터 낮에 올라 온 언론의 대통령 문재인 신년사 요지를 보고 들뜨기도 하고 안도의 마음을 가졌다. ‘내달부터 전국민 코로나 백신 무료 접종’. 이 제목은 약속이나 한 듯 거의 모든 신문과 방송들이 다 같았다. 나라가 전두환 시대로 돌아간 것인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이 제목과 기사 단수, 위치는 저녁부터 바뀌었다. 왜 그랬을까? 왜, 그 중요하고 반가운, 코로나 백신을 전국민이 당장 다음 달부터 공짜로 맞게 된다는 뉴스가 밑으로 내려가게 된 것일까?
무료는 당연하며 2월부터라는 시작보다는 집단면역 형성 가능 시기(11월 중으로 추정)가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언론들은 신년사가 나오자마자 ‘내달’ ‘전국민’ ‘무료’라는 말에 잠시 혹해 넘어갔던 것이다. 청와대는 바로 이것을 노렸다.
과거 군부독재 시대나 이후 문민정부 시대나 대통령이 국민들에게, 선의로 해석하면 희망을 주기 위해, 악의적으로 보면 속일 목적으로, 신년사에서 지난 공(功)은 부풀리고 과(過)는 줄이거나 생략해 버리며, 앞으로의 계획은 거창하게 포장하는 일은 으레 하는 그들의 특권이었다.
미국 대통령의 연두교서(年頭敎書, State of the Union Address(Message))도 별로 다르지 않다. 다만, ‘무료 접종’처럼 오해 또는 오도(誤導)를 일으킬 수 있는, 사실과 차이가 많은 표현은 사용하지 않는다. 신문의 머리기사 제목을 염두에 둔 말이라면 더욱 피해야 하는 것이다.
문재인 신년사의 해당 문단은 이렇게 돼 있다.
“국민 여러분,
마스크에서 해방되는 평범한 일상으로 빠르게 돌아가는 것이 급선무입니다.
점차 나아지고 있는 방역의 마지막 고비를 잘 넘기는 것이 우선입니다.
정부는 국민과 함께 3차 유행을 조기에 끝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다음 달이면, 백신 접종을 시작할 수 있습니다.
우선순위에 따라 순서대로 전 국민이 무료로 접종받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무료 접종에 관한 부연 설명은 전혀 없다. 그것이 획기적인 결단이라면 왜 이 한 문장으로만 끝냈겠는가?
다른 공(功)에 대해서는 중복이 느껴질 정도로 장황하게 소개(자랑)를 했는데도 말이다. 방역이 그렇고 경제성과가 그렇다. 물론 K-방역이 그토록 모범적이고(전체주의 방식의 통제와 상호 감시, 낙인(烙印) 속에 이루어진 측면이 크므로) 경제가 정말로 그렇게 실질적인 성장을 했는지에 관한 논란과 평가는 차치하고서...
‘전국민이 무료로 접종받을 수 있도록 하겠다’는 말 한마디만 한 것은 그것이 대단한 사실이 아니고 현재 세계적 추세로 볼 때 당연한 조치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과문(寡聞)한 탓인지 몰라도 코로나 백신을 시민들이 유료로 맞는 나라가 있다는 말은 들어 보지 못했다.
Google 이건 네이버건 어디를 검색해 봐도 그런 사례는 나타나지 않는다. 약 15억 인구를 가진 중국도 전인구가 무료로 백신 주사를 맞게 하겠다고 보건 관리가 엊그제 공식 발표했다는 뉴스를 외신은 전한다.
북미 선진국은 물론 유럽, 특히 문재인이 신년사에서 자부심 넘치게 강조한 OECD 국가들 중에 혹시 유료 접종을 실시하는 나라가 있다면 큰 뉴스가 될 것이다. 한국이 곧 진입할 전망이라고 그가 말한 GDP 규모 세계 10위권 나라들은 더욱 그렇다.
한 회분 당 3달러(아스트라제니커 제품)에서 37달러(모더나 제품)인 백신 비용 외에 접종료, 보관료 등 행정 비용을 피(彼) 접종자에게 부과하는 경우는 미국에 일부 있는데, 이 돈은 나중에 정부에 신청을 해서 환급 받게 된다.
캐나다의 경우 백신이 무료인지 유료인지는 아예 뉴스에 들어 가질 않는다. 그걸 따지는 언론 매체도 없고 궁금해 하는 사람도 없다. 개인의 선택이 제한된 팬데믹 상황에서 무료가 당연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접종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강제할 것인지가 관심사다.
사실 무료라는 말도 엄밀히는 옳지 않다. 결국 국민들이 이미 냈거나 앞으로 더 낼 세금으로 정부가 백신을 구입해 들여 와 인력과 장비를 사용해 접종하는 것이므로 국민 자기 돈으로 주사를 맞는, 사실상 유료 접종인 것이다.
이 ‘전국민 백신 무료 접종’이라는 제목 자리도 원래 ‘이명박, 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이 주인이었을 것이라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오는 4월 서울과 부산 시장 보궐선거를 앞두고 중도(中道) 층 표심 끌어들이기를 위해 민주당 대표 이낙연의 입을 빌려(필자도 그렇게 보고 진보 정치학자 최장집도 최근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그렇게 짚었다) 사면 얘기를 꺼냈다가 문빠들이 거세게 반발하자 백신으로 돌린 것이라고 봐야 한다.
문재인은 지난 1년 내내 나라를 어지럽히고 국민들을 피로하게 한 검찰총장 윤석열과 대통령을 대리한 법무부장관 추미애의 갈등에 대해서는 단 한마디 사과도, 언급도 하지 않았다. 윤석열 사태만큼 지난 한 해의 정권 과(過)가 큰 게 또 있는가? 그는 이 큰 잘못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말 않고 지나가 버린 것이다.
윤석열 사태보다 더 직접적으로 국민 삶의 질을 악화 시킨 문제가 있긴 있다. 바로 부동산 대란이다. 집값과 전세가가 폭등, 앞으로 큰 선거들을 차례로 망칠 수도 있는 문재인 정부 최대 실책에 대해서는 집권 세력 수장으로서 차마 그냥 지나갈 수 없었던 모양이다.
“주거 문제의 어려움으로 낙심이 큰 국민들께는 매우 송구한 마음입니다.”
이것도 한 문장이다. 그리고 다시 일반 시민 노동자들과 문재인 정권 주축인 586 운동권 출신들이 적(敵)으로 보는 재벌들을 비롯한 기업인들의 노력으로 이룬 결과들을 정부 치적(治積)인 것처럼 내세우며 장미빛 미래를 여러 문장의 화려한 수사(修辭)로 제시했다.
그가 세운 2021년의 목표, ‘회복과 포용과 도약의 위대한 한 해’가 이뤄지기를 필자는 독자들과 함께 진심으로 바라는 마음이다.
글/정기수 자유기고가(ksjung724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