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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방역? ‘자유’와 ‘안전’ 사이 국가의 역할


입력 2021.05.02 08:00 수정 2021.04.30 13:52        데스크 (desk@dailian.co.kr)

궤변 지속에 조치는 임시방편이고 앞뒤가 맞지 않아

위기 상황에 질병의 감시와 예방을 통해 국민 안전 보장해야

ⓒ데일리안 DB

문재인 정권은 ‘K방역’을 자랑하다가 백신 수급의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그 결과는 참담하다. 방역 후진국이라 비웃던 나라들이 마스크를 벗고 자유를 만끽하는데, 우리 국민은 언제 마스크를 벗을 수 있을지 알 수 없다. 한계선 상에 있는 자영업자들은 언제 문을 닫아야 할지 고민하며 하루하루 버티고, 일반 국민은 이번 여름이 지나치게 덥지 않기를 기도할 뿐이다.


문재인 정부 고위 공무원과 여권 정치인들은 아직도 백신 수급 실패에 대해 사과치 않고, 변명과 우격다짐으로 일관하고 있다. ‘방역과 백신은 별개’라는 억측과 ‘방역에서는 성공했다’는 궤변을 지속하고 있다. 그러니 모든 조치가 임시방편이고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나라는 원칙적으로 ‘국민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 존재 이유다. 이 부분에는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국가는 없다. 차이는 ‘자유’라는 가치다. 현대 민주주의 국가는 안전 못지않게 국민 개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여기서 방역의 태도가 갈린다.


대표적인 대비가 중국과 서구 민주주의국가 사이에 있다. 중국 우한에서 코로나19가 최초로 발생했다. 며칠 내로 바이러스의 실체를 과학적으로 확인했으나 공개하지 않고 숨겼다. 사회와 체제가 폐쇄적이었기 때문이다. 우한은 중국 체제의 명성에 걸맞게 완전히 폐쇄됐다. 지옥이 따로 없었지만, 중국 체제가 할 수 있는 최고의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 사이 영문도 모르게 전 세계 국가들로 코로나 바이러스가 퍼져나갔다. 대부분 국가는 당황했다. 일부는 중국과의 교류를 차단하는 대응을 했다. 우리처럼 관대한 대응을 한 나라도 있었다.


반면 미국과 유럽은 달랐다. 방역에 대한 요구와 자유에 대한 바람이 뒤섞이며 혼란이 이어졌다. 감염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었고, ‘국가 위기’ 선포를 하는 나라들도 늘어났다. 거리는 시체로 넘쳤고, 의료시스템은 제 기능을 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마스크를 쓰지 않을 자유’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낮아지지 않았다. 바이러스 발원지인 중국이 ‘코로나 종식’을 선언했을 때도 서구권 국가들에서는 이런 상황이 계속됐다.


이런 상황에서 ‘K방역’이 부러움을 샀다. 기본적으로 중국 모델을 따른 1차적 대응이었다. 대만과 싱가포르 같은 나라는 외국과의 관계 폐쇄와 국민 간 거리두기를 병행했다. 물론 이들은 초기부터 백신 도입 전략을 세우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율배반적이게도 중국 관문은 열어 놓은 채 국민의 희생만 강요했다. “창문을 열어놓고 모기를 잡겠다고 한다”라는 비아냥거림을 샀지만, 헌신적인 의료진과 홍익인간(弘益人間) 정신으로 무장된 국민의 노력으로 어느 정도 상황통제가 되었다. 그러나 문재인 정권은 그 공을 독식하고 자랑하며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정작 해야 할 일은 내버려 뒀다. ‘게임 체인저(game changer)’인 백신 확보에 실패한 것이다. 그런데도 반성은커녕 엉뚱한 조처를 했다. 청와대에 방역기획관을 신설하고 기모란 교수를 임명했다. 기모란 교수가 백신을 폄훼한 말이 논란이 되자, ‘백신 전문가가 아니라 방역전문가로 임명했다’라는 궤변으로 피해 갔다. 국민 뿐 아니라 전문가들을 바보 취급한 발언이었다.


질병관리청이 실무책임을 지고 있는데 구태여 청와대에 방역기획관을 임명했다면 좀 다른 역할이 있어야 설득력이 있다. 그 역할은 국제적인 백신 수급 노력이다. 백신이 안보 자산이 되어 개별 부처가 감당할 수 있는 사안이 아니게 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자리에 백신에 대한 가짜뉴스를 전파한 거짓 전문가를 임명한 것이다. 그러니 그 역할과 상관없이, 그의 남편과 부친의 행적이 조명되며 ‘보은 인사’라는 이야기가 설득력 있게 회자하는 것이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대응이 계속되는 원인을 알아야 제대로 된 대책이 가능하다. 본질적 원인은 문재인 정권이 ‘국가는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인식이 정립되어 있지 않은 사이비 정권이기 때문이다.


국가는 ‘코로나19’ 같은 위기 상황에 질병의 감시와 예방을 통해 국민의 안전을 보장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 국민의 자유는 어느 정도 제한될 수 있다. 그러나 정도가 문제다. 선진적 민주주의 시스템은 극단이 아니라 절충을 통해 상반된 가치관의 균형을 구현한다. 우리나라는 이런 자유민주주의 국가다. 자유를 완전히 박탈할 수 있고 해도 되는 전체주의, 사회주의와는 완전히 다른 국가 시스템이다. 물론 국민이 적극적으로 선택한 결과다.


‘코로나19’ 상황에서 제도적 우위가 분명히 드러났다. 중국식 모델은 자유의 희생을 통해 안전을 추구했다. 그리고 ‘자체적으로 백신을 개발해 접종한다’고 선전한다. 하지만 세계는 중국 백신을 신뢰하지 않는다. 같은 전체주의 국가인 러시아의 ‘스푸트니크 브이’ 백신과 비교해도 신뢰는 바닥이다. 우리 정부가 안정성이 검증된 백신 도입에 실패하자, 여권 일부에서 ‘러시아 백신도 고려해 볼 수 있다’는 주장이 나온다. 하지만, 자료의 불투명성과 부실한 임상실험 검증으로 국제사회와 전문가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한 국민 불안으로 러시아 백신 도입이 쉽지는 않을 것 같다. 자유가 보장되지 않은 폐쇄 국가의 한계이다.


미국과 영국 등 서구 민주주의 사회는 대응이 달랐다. 사회는 안전과 자유가 서로 뒤엉켰고 국가는 조정에 힘썼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백신 개발에 매달렸다. 우리나라 여권은 ‘방역에 실패한 국가들이 백신에 매달린다’고 했지만, 우리 국민은 자유를 억압해 통제하는 것의 한계를 분명히 알게 됐다. 정부에 실망한 국민들은 정부가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 지경에 이르렀다. 원래 과학은 결핍에 대한 합리적 대안 탐구를 통해 발전했다. 억누르기만 하면 잠시의 효과는 있을지라도 근본적인 해결은 물 건너가 버린다. 우리가 ‘K방역’을 자랑하며, 기모란 기획관처럼 ‘백신은 비싸고 위험하니 다른 나라에서 위험성이 검증된 이후에 들여와도 늦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동안, 선진국들은 백신으로 상황을 반전시키고 있다. 자유도 유지하고 성과도 내는 전형적인 선진국형 모델을 현실화시킨 것이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이다.


“일시적인 안전을 구하기 위해, 필수적인 자유를 포기하는 사람들은 자유와 안전을 누릴 자격이 없다. (Those who would give up essential liberty to purchase a little temporary safety, deserve neither liberty nor safety.)”


프랭클린이 우리에게 묻는다. 대한민국은 ‘자유’와 ‘안전’ 중 어떤 것을 누리고 있는가? 문재인 정권은 대한민국을 운용할 자격과 능력이 있는가?


글/김우석 정치평론가


데스크 기자 (desk@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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