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과 어머니는 2년의 간격을 두고 하늘나라로 가셨다. 비록 아흔을 넘긴 연세였지만 자식으로서 섭섭하고 애석한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추석을 맞아 두 분과의 옛 추억을 생각하면 아쉬움도 크지만, 함께 모시고 지냈을 때 행복했던 순간이 떠올라 저절로 미소가 지어진다.
결혼할 당시 장모님만 계셨다. 명절이나 생신 같은 행사가 있어 처가에 들리면 술 좋아하는 처남들과 주거니 받거니 하다 보면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몰랐다. 장인과의 술자리를 갖거나 사랑스러운 손길 한번 스치지 못해 섭섭한 점도 없지 않았지만 그런 점을 고려해서인지 자상하신 장모님이 눈에 띄지 않게 세심히 챙기셨다.
명절 끝나고 지방에서 서울로 오려면 한없는 차량정체를 피하기 위해서는 새벽 4시쯤에는 출발해야 한다. 아들과 딸은 외할머니가 이른 새벽에 일어나 끓여 주신 육개장을 맛있게 먹었던 일을 지금도 가끔 이야기한다. 갖가지 명절 음식과 선물로 들어온 과일을 비롯하여 차비까지 쥐어 주셨다. 술 좋아하는 작은 처남에게는 조 서방 본 좀 보라고 말씀하실 정도로 무한히 신뢰하셨다.
워낙 총명하여 시골에 사실 때는 온 동네 사돈지를 다 쓰셨으며, 집안 대소사 날짜까지 기억하고 챙기셨다. 돌아가시기 1년 전에 어머니와 함께 양평 농원에서 보름 동안 모셨다. 지팡이를 짚고 시골길을 걷거나 잔디밭에 앉아 자매처럼 다정스럽게 지내시는 모습을 보고는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동이 불편해 요양병원으로 가셨는데, 정신이 맑고 깔끔하신 성격이라 기저귀 착용을 한사코 거부하셔서 부축을 받아 화장실까지 가셨다. 음식을 제대로 드시지 못하니까 뼈대에 피부만 붙어있는 모습이셨다. 입원한 지 한 달 지나 백수를 앞둔 아흔아홉에 평소 기도하신 대로 주무시듯이 조용히 하늘나라로 가셨다. 양평에서 보름 동안 함께 지내면서 잊지 못할 추억을 남길 수 있어 다행이었다. 뒤돌아보면 장모님의 끝없는 사랑을 받기만 한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시골에서 고생하시던 일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1960년대 아버지가 고향에서 공무원으로 근무하시다 홀로 대구로 전근을 가시는 바람에 농사일은 온통 어머니 차지였다. 온갖 밭일과 지게질 뿐 아니라 똥장군까지 지고 나르기까지 하셨다. 동네 어르신들이 어머니 지게 지고 가는 모습을 보고는 "여자지만 종아리가 탱탱하고 힘이 세어 지게도 잘 진다."라며 대견해하셨단다.
중학교 다닐 때까지 어머니를 도와 땡볕에서 밭을 매거나 산에 땔감을 하러 다녔던 일들이 생각난다. 친구들은 날씨가 더우면 웅덩이에 풍덩 뛰어 들어가 수영을 하며 놀기도 하였는데 밭 매느라 틈이 없어 한없이 부럽기만 했다. 농사일이 늦게 끝나다 보니 매일 깜깜해진 후에야 저녁을 먹게 되어 '우리는 언제나 좀 일찍 먹을 수 있을까?'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어 어른이 되면 해 지기전에 먹으리라 다짐하기도 했다. 8형제를 키우면서 농사일까지 도맡아 하시느라 육체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피폐해지셔서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까지 하였다.
살림을 합친 다음에도 박봉에 열 식구 먹이고 공부시키느라 항상 쪼들렸다. 아버지 은퇴하고 자식들이 결혼하면서 형편이 조금 나아져 살만해지자 지아비를 암으로 먼저 보내셨다. 자식 앞에서 싸움 한 번 하시지 않을 정도로 금실이 좋으셨는데 슬픔과 상실감이 얼마나 크셨을까? 어머니의 그 심정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으려나.
그 후 큰아들 집에서 10년을 사시다가 그 아들마저 먼저 보내고 혼자된 며느리와 또 10년을 지내셨다. 아무리 잘 모신다고 하여도 남편 사랑받으며 오순도순 살 때와는 비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마지막 2년은 요양원과 요양병원에서 지내셨지만, 코로나 19로 면회가 어려워져 한 달에 한 번 비닐 가름막을 사이에 두고 손 한 번 잡아보지 못한 채 겨우 몇 마디만 나눈 채 헤어져야 했다.
병원 침대에 혼자 누워 계시면서 자식들이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허탈하고 외로운 심정은 또 어떠했을까? 내가 그런 상황이었다면 정신이상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가슴이 저미어 왔다. 콧줄로 미음을 드시면서부터 점점 쇠약해지셔서 요양원에 가신 지 2년 만에 가족들과 영원한 이별을 하셨다. 시골에서 어머니와 함께 밭 매고 뽕잎 따서 누에 치고 가을걷이하며 고생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선한 눈빛, 따뜻한 사랑은 세상을 살아가는 자양제가 됨을 지금에야 깨우치면서 이제 추억으로만 간직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어머니와 장모님 두 분 모두 이제 우리 곁을 떠나셨다. 결혼 이후에는 객지에 떨어져 살다 보니 명절이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만 뵐 수 있었기에 어릴 적 어머니와의 추억들이 유독 생생하게 떠오른다.
양평에서 두 어머니를 모시면서 겪었던 순간들이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그때의 일들을 생각하면 회심의 미소를 지을 수 있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른다. 두 분이 양지바른 잔디밭에 앉아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시던 모습이나, 식사 후 탁자에서 간식으로 군고구마나 바나나를 맛있게 드시는 장면, 지팡이를 짚거나 보행기를 밀며 시골길을 걸으시는 정겨웠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환갑 지난 아들을 어린애 인양 노심초사하는 어머니 말씀에 역정을 부린 것이나, 장모님의 혈압이 200까지 올라가서 곧 돌아가실 것 같은 큰 고비를 넘기셨던 마음 아팠던 일들이 생각난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두 어머니의 사랑과 남기고 가신 추억을 행복한 선물로 받아 오랫동안 함께 할 것이다.
인간은 건강하게 오래 살기를 희망한다. 장모님은 아흔 아홉에, 어머니는 아흔 하나에 이 세상을 하직하셨지만, 자식으로서 다시는 부를 수 없는 이름이기에 슬픔과 아쉬움이 사무쳐온다. 그래도 큰 병치레 없이 건강하게 사시다가 평안하게 생을 마쳤으니 적어도 오복 중의 하나는 누리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부모님이 곁에 안 계시면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 효도다'라고 말하면서도 대부분 돌아가시고 난 다음에 아쉬워하며 후회한다. 나 역시 더 잘해드릴 걸, 더 자주 찾아 뵐 걸 하는 회한이 밀려온다. 자식이란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인가 보다.
조남대 작가ndcho5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