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극적 루머 확산하며 개인‧기업 피해 회복 불가
21대 국회 발의 악성 댓글 규제 강화 법안 29일 자동 폐기
22대 국회서 '징벌적 손해배상제' 등 실효성 있는 규제 강화에 속도 내야
‘사이버 불링(Cyber Bullying)’, ‘사이버 렉카(Cyber Wrecker)’. 인터넷상의 악의적 허위 사실 유포로 심각한 피해를 입는 이들이 늘어나며 등장한 신조어다.
명예훼손은 물론, 정신적 고통을 견디다 못해 생을 마감하는 개인이 있는가 하면, 힘들게 쌓아온 브랜드 이미지나 신뢰성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존립을 위협받는 기업도 있다.
허위, 비방 댓글, 이른바 ‘악플’을 사전 차단하고 사후 처벌해야 한다는 목소리는 예전부터 높아 왔지만 법적 규제는 미미해 익명성 뒤에 숨어 무고한 희생자를 만드는 사례는 반복되고 있다.
21대 국회에서 풀지 못한 이 해묵은 과제를 오는 30일 개원을 앞둔 22대 국회에서 신속하게 다뤄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온라인 댓글창은 네티즌들의 실시간 소통과 온라인 공론의 장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개인이나 단체, 기업을 겨냥한 악의적 허위 정보와 편중된 여론조작의 장으로 변질됐다는 지적이 나온다.
뉴스에서 유무죄가 확정되지 않은 특정인이나 단체에 대한 의혹이 제기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문제는 이들이 법적 판단을 받기 전에 마녀사냥을 당한다는 것이다. 의혹 제기와 동시에 미확인 정보와 자극적 표현이 가득한 악성 댓글이 금세 포털 등의 댓글창에 가득 쌓인다.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극적인 허위 사실로 한껏 포장된 댓글은 군중 심리를 뒤흔들기도 한다. 이는 사이버 공간에서 벌어지는 특정인에 대한 집단 괴롭힘을 뜻하는 ‘사이버 불링(Cyber Bullying)’ 이른바 ‘좌표 찍기’로 이어지기 쉽다. 불특정 다수로부터의 잇따른 비난을 견디지 못한 피해자는 우울증을 앓거나 스스로 극단적 선택을 하기도 한다.
지난 3월 스스로 생을 마감한 김포시청 공무원 A씨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야간에 실시된 긴급 도로공사와 관련해 한 온라인 커뮤니티에 ‘차량 정체가 극심하다’며 담당 공무원 A씨의 신상과 개인정보가 올라왔다.
A씨는 당일 자정 이후까지 현장을 지켰지만, 댓글창에는 ‘공사 승인하고 집에서 쉬고 계신 분이랍니다’, ‘집에서 쉬고 있을 이 사람 멱살을 잡고 싶다’ 등 허위 사실이 담긴 악성 댓글이 다수 달렸다. 지속되는 악성 댓글과 민원 등 비난에 괴로워하던 A씨는 닷새 뒤 차 안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특정 이슈가 발생하면 재빨리 콘텐츠를 만들어 조회 수로 돈벌이하는 ‘사이버 렉카(Cyber Wrecker)’도 등장했다. 이들로 인해 대중의 관심을 받는 유명인들은 수시로 악의적 허위 댓글에 시달려야 한다.
지난 2월 한국언론진흥재단 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 중 사이버 렉카가 사회적 문제라는 점에 공감하는 비율은 92%에 달했다. 사이버렉카 콘텐츠로 인한 유명인의 권리 침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안으로는 ‘가해자에 대한 처벌 강화’(94.3%)가 가장 많이 꼽혔고 ‘피해자 구제 제도 강화’(93.4%), ‘플랫폼 자율규제 강화’(88.2%)가 뒤를 이었다.
사회적 신뢰를 기반으로 사업을 영위하는 기업들의 경우 허위 사실로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입기도 한다.
과거 과시성 추천수 모으기나, 화풀이 차원의 악플로도 부작용이 많았던 인터넷 댓글은 금전적 이해관계로까지 확산되며 악영향이 더 커졌다. 일부 사업자가 경쟁사를 비방하는 악성 댓글을 조직적으로 올리거나, 돈을 받고 실사용자를 빙자한 허위 리뷰를 작성해주는 전문대행사도 등장했다.
최근 법원은 지난 2017년 경쟁사에 대한 허위 비방 댓글을 조직적으로 작성해 손해를 끼친 유아매트 업체 B사 대표에게 이례적으로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경쟁사 제품의 친환경인증이 취소되자 불법적으로 구매한 수백 개의 아이디를 활용해 맘카페 등에서 소비자인 척 후기와 댓글을 조작한 혐의가 유죄로 인정된 것이다.
당시 한국환경산업기술원은 친환경 인증 취소에도 경쟁사 매트의 인체위해성은 없다고 밝혔지만, B사 대표 등은 경쟁사 매트에 대해 ‘독극물 매트’라고 비방하거나 해당 매트를 없애니 아이의 아토피가 없어졌다는 등 불안감을 조성하는 거짓 후기와 댓글을 다수 게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명백한 불법 행위임에도 불구, 가해자와 피해자의 상황은 뒤바뀌었다. 이전까지 업계 2위였던 B사는 1위로 올라서며 현재도 승승장구하고 있는 반면, 허위 비방의 피해자인 경쟁사는 매출이 90% 이상 급감한 데 이어 이듬해 적자를 내고 공장을 매각하는 등 존폐 위기에 처할 정도로 피해를 입었다. 당시의 피해는 7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복하지 못한 상태다.
대기업이라고 해서 악성 허위 댓글로 인한 피해에서 자유롭진 못하다. 현대자동차는 ‘기술 탈취’ 의혹으로 오랜 기간 악플에 시달리다 법원 판결에 의해 의혹은 벗었지만 기업 이미지에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
지난 2016년 자동차 부품사 A사는 현대차가 자사의 기술을 탈취했다고 주장하며 10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기술 탈취가 없었다고 맞선 현대차는 1심과 항소심, 상고심에서 모두 승소했지만, 소송 기간 동안 ‘협력업체는 안중에도 없느냐’는 등 비방성 댓글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의 악성 댓글은 지금까지도 고스란히 남아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법적으로 허위 사실임을 입증하더라도 악성 댓글은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고, 피해 회복도 쉽지 않다”면서 “저질 제품의 홍보 댓글을 돈을 받고 작성하는 전문대행사가 등장하는 등 온라인 댓글창은 이미 편중된 여론조작의 장”이라고 지적했다.
법조계에서는 현행 법 체계로는 악성 댓글과 그로 인한 피해자 양산이 근절되기 힘들다고 입을 모은다.
현행법상 허위사실 유포나 위계에 따른 업무방해에 따른 처벌은 5년 이하 징역 또는 1500만원 이하 벌금에 그친다. 악성 댓글에 악의적 허위 사실이 포함돼 있는 경우 정보통신망법에 의해 7년 이하 징역 또는 5000만원 이하 벌금형도 가능하지만, 대부분 유죄를 받더라도 한도에 크게 못 미치는 벌금을 내는 선에서 끝난다.
결국 무분별한 악성 댓글로 인한 사회적 폐해를 막기 위해서는 규제와 처벌을 지금보다 강화해야 한다는 여론이 압도적이다. 한국리서치 조사에 따르면 국민 10명 중 8명이 악성 댓글 규제 강화에 찬성한 것으로 나타났다.
21대 국회에서 이와 관련된 노력이 있어왔지만, 성과 없이 회기를 마무리할 상황이다. 지난 5년간 악의적 허위사실 또는 미확인 정보를 포함한 게시글과 댓글에 대한 규제 및 처벌 강화를 골자로 하는 10건의 정보통신망법 개정안이 발의됐지만, 본회의 문턱을 넘지 못하고 오는 29일 21대 국회 회기 만료와 함께 자동 폐기될 운명이다.
이후 출범하는 22대 국회에서는 악성 댓글에 대한 실효성 있는 민‧형사적 규제 강화에 좀 더 속도를 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힘을 얻는다. 특히 악성 댓글에 대한 ‘징벌적 손해배상제’는 재발 방지를 위한 경고 효과와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모두 달성할 수 있는 현실적 규제 방안이라는 평가가 많다.
한 전문가는 “악성 댓글로 인한 사회적 폐해가 심각하다는 공감대가 일찍이 형성됐지만,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논리에 가로막혀 번번이 법 개정이 좌초됐다”며 “조속한 법 개정이 이뤄지지 않으면 앞으로도 많은 피해자들이 양산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