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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 인쇄 산업의 쇠락... 엡손이 찾은 돌파구는 '섬유 리필'


입력 2025.02.06 16:05 수정 2025.02.07 10:42        시오지리(나가노) = 임채현 기자 (hyun0796@dailian.co.kr)

日 엡손 히로오카 사무소서 '페이퍼랩' 장비 시연

물 쓰지 않는 '페이퍼 업사이클링', 친환경·보안 중점

종이 재활용 넘어 새 가치 창출... 의류도 적용 가능해

산업 지형 바꾸려는 혁신... 엡손 "적절한 수요 기대"

엡손의 '페이퍼랩' 신형을 통해 출력한 재생 용지. 육안으로 봐서 일반 용지와 큰 차이점을 느끼기 어렵다.ⓒ임채현 기자

"종이를 무한 리필한다고요?"


시계 제조로 출발해 1964년 도쿄 올림픽을 계기로 출력 전자기기 산업의 포문을 열어 젖힌 엡손이 전환기를 맞고 있다. 최근 기업들의 DX(디지털 전환) 추세로 '페이퍼리스' 문화가 확산되면서, 프린터 산업에 기반을 두고 있는 엡손에도 위기감이 닥쳤기 때문이다. 사양 산업을 떠나 생존을 모색해야 한다는 우려도 나오지만, 글로벌 프린터 시장 세 손가락 안에 드는 엡손이 내놓은 해결책은 따로 있다. 바로 친환경을 기반으로 한 "종이 재생산"이다.


공식 명칭은 '페이퍼랩'. 폐지를 분해해 새 종이로 탈바꿈시키는 페이퍼 업사이클링이다. 재활용을 의미하는 '리사이클링'이 아닌 '업사이클링'이란 명칭이 붙은 것은 단순 재활용을 넘어 새 가치를 창출한다는 의미다. 엡손이 창업 초기부터 강조하고 있는 '지속 가능성' 기조와도 맞물림과 동시에 최근 기업 내 보안 이슈가 불거지는 것들을 한 번에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 착안했다.


엡손의 '페이퍼랩' 신형. 전작에 비해 면적과 소비전력이 절반으로 줄었다.ⓒ임채현 기자
엡손 친환경 솔루션 핵심 기지, 히로오카 사무소에서 내놓은 것은

5일 일본 나가노현에 위치한 엡손 히로오카 사무소에서 세계 최초 종이 업사이클링 시스템 '페이퍼랩'의 신형 모델이 공개됐다. 22만㎡의 부지에 6800여명 가량이 근무하는 히로오카 사무소는 엡손 친환경 솔루션의 핵심 기지다. 엡손이 이날 이 친환경 기지에서 국내 미디어에 최초로 선보인 페이퍼랩 신제품은 폐지로 새 종이 생산이 가능하다. 전작 페이퍼랩에 비해 성능이 대폭 향상됐다.


눈앞에 놓여있는 거대한 기기에 세로로 잘린 A4 폐지를 넣고 시작 버튼을 누르자 곧 이어 표면이 깨끗한 새 용지가 생성돼서 나오기 시작했다. 폐지가 작은 섬유 상태로 분쇄됐다가 열과 압력을 받아 분말로, 접착제롤 통해 다시 종이 형태로 정형화된 것이다. 페이퍼랩 신형은 915장 분량의 A4 이면지를 넣으면 720장의 새 종이를 만들어낸다. 복사 용지는 물론, 명함과 팸플릿 용지 생산이 가능하고 종이 색상 및 두께도 조절 가능하다.


해당 제품은 단순히 '종이 생산'에 방점을 두지 않는다. 기존에도 일반 종이 재생 기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만 엡손 제품이 일반 제지기와 다른 점은, 물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물을 쓰지 않으니 폐수도 발생할 일이 거의 없다. 엡손이 독자 개발한 '드라이 섬유 기술(Dry Fiber Technology)' 을 적용해 폐지를 섬유로 분해하고 결합하는 과정을 반복하며 새 종이를 만들어 내는데 일반 제품에 비해 생산성은 오히려 높다.


이번 신형에 앞서 이전 모델의 경우 지난 2016년 처음 개발됐다. 해당 제품은 현재까지 일본에 85대, 유럽 일부 기업 3대 등 총 88대 정도가 판매됐다. 일본 내에서도 금융, 건설, 공공기관 등에서 주로 사용되고 있다. 엡손 관계자는 "단순히 종이 구매 비용을 아끼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안에 민감한 곳, 궁극적으로 지속가능성이라는 가치를 추구하는 기관이 페이퍼랩을 도입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엡손의 '페이퍼랩' 신형 파쇄기에서 파쇄된 종이. 여기에 열과 압력을 가하고 접착제로 섬유를 이어붙여 종이 형태로 재생산한다.ⓒ임채현 기자
페이퍼랩 신형, 소비전력과 가격은 'DOWN', 효율성은 'UP'

페이퍼랩 신제품의 지향점 역시 전작과 마찬가지로 '친환경 솔루션'이다. 다만 전작보다 기능이 강화됐다. 소비전력은 절반 수준으로 떨어뜨렸고, 재생용지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접착제도 자연 유래 성분을 사용했다. 아울러 디자인에도 변형을 주면서 사무실 환경에 어울리는 디자인을 채택했다. 특히 파쇄기와 본체를 별도로 구성해 보안성과 편리성을 높였다. 가격도 전작 제품 2000~2500만 엔 (약 2억 원~2억 4000만원) 수준에서 더 저렴하게 책정될 예정이다.


페이퍼랩 신형을 소개한 엡손 관계자는 "이전 제품은 본품에 파쇄기가 함께 탑재돼있어, 여러 지점에서 파쇄해서 이를 거점으로 모아 종이를 생산할 수 있다"며 "페이퍼랩 장비 가격이 아무래도 높은 만큼 경제적 부담을 덜어줌과 동시에 각 기관에서 사용한 종이를 내부에서 처리한 뒤 이동 시킬 수 있어 보안 이슈에 강점을 지닌다"고 강조했다. 해당 제품은 1만3000시간 동안 쉬지 않고 가동이 가능하다.


엡손은 그간 주력하던 잉크젯 프린터 사업에서 나아가 프린터 업계의 전환점을 끌고 오겠다는 포부다. 여전히 글로벌 프린터 시장에서의 엡손 지위는 공고하다. 열 사용 없이 인쇄하는 친환경 '히트프리' 기술로 시장 점유율을 강화하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종이 재생산 자체에도 친환경 개념을 도입해 아예 산업 지형을 바꿔보겠다는 시도다. 특히 페이퍼랩의 경우 단순히 사무 공간의 인쇄에 그치지 않고 의류나 다른 산업 분야에도 응용이 가능하다는 점이 강점이다.


페이퍼랩으로 의류 원단을 재생산한 모습.ⓒ임채현 기자

실제로 엡손은 이날 '모나리자(Monna Lisa)' 대형 텍스타일 프린터(ML-8000)를 소개하며, 섬유 인쇄 기술 기반의 솔루션에 페이퍼랩 적용이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모나리자' 제품은 다이렉트 투 패브릭(Direct to Fabric) 방식을 적용해, 원단에 직접 무늬를 프린팅하는 것이 특징이다. ML-8000은 모든 원단에 인쇄가 가능할 뿐더러 아날로그 날염 대비 전후처리 및 날염 과정에서 사용되는 물과 에너지의 소비량이 적어 친환경적인 제품이다.


해당 제품 한 대로 커튼, 소파 등 인테리어 패브릭부터 스포츠 웨어와 같은 기능성 섬유, 스카프와 넥타이 같은 액세서리까지 다양한 원단에 인쇄할 수 있다. 패션 업계에서도 각광 받고 있으며, 국내 대표 디자이너 이상봉과 협업해 친환경 패션쇼를 개최하고, 지속 가능한 패션을 위한 '친환경 디지털 텍스타일' 공모전도 진행한 바 있다. 여기에 페이퍼랩을 도입할 경우, 버려지는 원단을 재활용해 다시 옷감을 생산하면서 환경 오염 감소에 크게 기여할 수 있다는 기대다.


한편 페이퍼랩의 한국 시장 출시는 미정이다. 상반기 중 데모 장비는 설치된다. 엡손 측은 "이는 경제성보다는 환경 관점에서 의미를 지니는 제품이기에, 민간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도입하는 분위기는 아니다. 다만 환경 보호 외에도 페이퍼랩이 시장 반응을 토대로 구체적 계획을 수립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엡손 관계자는 "페이퍼랩은 종이 생산 전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 배출을 1년 간 약 6.2톤 감소시키며, 완전히 감축하지 못한 이산화탄소 배출량의 경우에는 카본 오프셋(carbon offset)으로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실질적인 0으로 만든다. 사용된 폐지를 원료로 연간 85그루의 목재 사용을 줄이고, 일반 종이 생산 대비 물 사용량을 약 1%로 낮춰 환경 보호에 기여한다. 최근 기업들 사이에 ESG 경영이 확대되고 있는 만큼, 시장의 수요가 점차 높아질 것으로 기대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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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채현 기자 (hyun0796@daili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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