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투기자본 이대로 놔둘건가-상>겉 속 다른 두얼굴
재계 "투기자본 힘 빌리다가 국부유출과 기업투자위축"
삼성, 현대차, SK 등 국내 기업들이 해외 행동주의 투자자들의 최대 공습처로 전락하고 있다. 이들 기업들은 총수 단독지분이 1%밖에 되지 않는 곳들이다. 특히 ‘외국계 큰 손’ 198곳이 국내 상장기업 285개사의 지분 5%를 보유하고 있다. 최근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가 주주이익을 앞세워 삼성물산 합병을 반대하면서 경영권을 위협하고 있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앞서 SK㈜와 KT&G도 2003년과 2006년 각각 소버린자산운용과 칼 아이칸 등 해외 투기 자본의 공격으로 곤욕을 치렀다.
이들은 합병비율의 불공정성을 내세우며 소액주주 가치 보호라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포퓰리즘을 악용해 막대한 이득을 취하려는 새로운 행동주의펀드(Activist fund)의 전형이다. 특히 이번 사태를 두고 정부가 국내 기업들을 취약한 지배구조로 내몰면서 투자의욕을 꺾으면서도 투자를 이유로 외국 투기자본 유입을 방관하는 정책적 실패가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지적이다.
이에 행동주의펀드들의 실체와 함께 국내 기업들이 외국계 투기 자본의 먹잇감이 된 배경, 그리고 현재의 대기업 관련 정책과 제도가 갖고 있는 문제점을 살펴보고 앞으로 어떤 변화가 필요한지 짚어본다.< 편집자주 >
“과거 행동주의 펀드들은 기업의 주식 매집으로 기업을 장악해 좌지우지하는 '무대포' 스타일이었다면 이제는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며 소수주주들로부터 지지를 이끌어 나가는 포퓰리즘을 가장한 스타일로 변화하는 등 더욱 교묘해지고 있다.”
신장섭 싱가포르국립대학교 교수는 최근 행동주의 펀드들이 과거와 다르게 변모하면서 그 실체를 파악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행동주의펀드는 대량 주식매수를 통해 특정 기업의 주주로 등재한 후 직접 기업 영업에 개입하는 등 보다 적극적으로 이익을 창출하는 투자자다. 최근 삼성물산과 제일모직간 합병을 반대하며 분쟁에 뛰어든 엘리엇매니지먼트도 이러한 행동주의펀드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1980년대 행동주의펀드 초창기만 하더라도 해당기업의 주식을 끌어모아 이사회를 장악한 뒤 기업을 분해하고 자산을 매각하는 방법을 주로 사용하던 기업사냥꾼(Corporate raiders)들이 대부분이었다. 자신들의 힘을 이용해서 이익을 관철하는 단순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1990년대 이후 행동주의 펀드들이 소수주주(minority shareholder)로 이사회에 참여해 기업 정책에 영향력을 발휘하며 이익을 추구하는 전략을 더 많이 취해 왔다.
소수주주로서 영향력 행사를 목적으로 다른 주주들과 연합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명분을 내세워 다른주주들을 끌어들이는 포퓰리즘 전략을 구사한다. 지배주주로부터 뭔가 불이익을 당하고 있다는 인식을 심어주고 주주연대를 통해 이를 해결할 수 있다는 나름의 비전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일각에서는 행동주의펀드들이 주주행동주의를 이끌어 기업의 성장에 기여한 측면이 없지 않다는 의견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증권사 애널리스트는 “이번 삼성물산과 제일모직간 합병에서도 주주들의 불만이었던 합병비율 문제를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면서 “전략이나 접근방식을 차치하면 문제인식은 뛰어난 편”이라고 말했다.
▲기업들 쥐락펴락=그러나 과거 행동주의펀드들의 사례를 보면 부정적인 영향이 크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중론이다.
행동주주펀드들은 일정한 지분을 확보하면 임시주주총회 등을 통해 이사후보 추천, 경영진 교체, 비핵심자산 매각, 인수합병(M&A) 추진 등 다양한 요구를 관철시키는 과정에서 기업의 정상적인 경영활동을 저해시킨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주주들의 단기적 이익에만 매몰돼 기업의 미래 자원들을 주주들에게 몰아줘 기업의 장기적 성장을 저해한다는 것이다.
행동주의펀드의 가장 대표적인 곳이 엘리엇이다. 지난해 7월 글로벌 1위 스토리지 업체 EMC의 지분 2%를 취득한 후 EMC의 자회사인 VM웨어 분사를 요구했다. 지난 2013년에는 네트워크 장비업체 리버베드의 지분을 확보한 뒤 경영진을 압박해 수차례 인수 제안을 하는 등 회사를 쥐고 흔들었다.
지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로 제너럴모터스(GM)가 파산위기에 처했을 때는 자회사였던 델파이를 헤지펀드 폴슨 및 서드포인트와 함께 헐값에 매집했다. 이후 GM회생작업을 총괄하던 미국정부에 델파이의 채무를 탕감해주고 자금을 지원해주지 않으면 GM이 문을 닫게 만들겠다고 압력을 넣기도 했다.
최근에는 핀란드 노키아가 인수하려는 프랑스-미국계 업체인 알카텔-루슨트의 지분을 확보했하는 등 알박기 행태를 지속하고 있다. 엘리엇은 주식 스와프(지분 교환) 방식으로 알카텔-루슨트의 지분 1.3%를 확보하는 등 여전히 인수합병 과정에서 끼어들기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또 다른 행동주의펀드 P숀펠드에셋매니지먼트(PSAM)도 프랑스의 운하 및 수도시스템을 총괄하던 국영기업으로 세계 2위의 복합 미디어 그룹으로 성장해 온 비벤디를 걸고 넘어졌다. 비벤디에게 현금자산 중 90억 유로를 주주들에게 배당하라고 압박하는가 하면 유니버셜뮤직을 매각하라는 요청을 하기도 했다.
트라이언과 서드포인트 등 다른 행동주의펀드들도 이와 유사한 모습을 보였다. 트라이언은 지난 2012년 5월 산업용 장비 제조업체 잉거솔랜드의 지분 7%를 취득한 뒤 자사주 매입과 배당 확대 등을 요구했다. 서드포인트도 지난 2013년 소니 지분 6.5%를 확보하고 소니엔터테인먼트 분사를 요구하기도 했다.
=행동주의펀드의 타깃은 기업에만 국한되지 않고 국가도 포함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엘리엇으로 지금까지 페루·아르헨티나·콩고 등지에서 악명을 떨쳐왔다. 엘리엇이 '벌처펀드'라는 명칭을 얻게 된 곳은 페루였다.
엘리엇은 지난 1996년에 부도가 났던 액면가 2070만달러 규모의 페루채권을 1140만 달러에 샀다. 그리고 페루가 그동안 내지 않은 이자까지 합쳐서 5800만달러를 지급하지 않으면 ‘브래디 플랜’이 집행되지 못하도록 하는 소송을 냈다. 당시 미국 브래디 재무장관과 채권 은행, 중남미 국가들이 중남미 국가들의 부채를 탕감해주고 성장으로 복귀하도록 도와줘서 과실을 나눈다는 것이 이 계획의 골자였는데 이를 방해한 것이다.
아르헨티나에서는 액면가 6억3000만달러의 채권을 7% 정도 밖에 안 되는 4800만달러에 매입한 뒤 아르헨티나 정부에게 이자까지 합쳐서 23억달러(약 2조5000억원)을 내놓으라고 소송을 하기도 했다.
콩고에서는 국제기구나 선진국들이 기아나 용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원조해주는 돈마저도 채무 갚는데 먼저 써야 한다며 지급을 중단시키는 방식으로 2000만 달러에 산 부실채권으로 9000만 달러를 받아내는 등 탐욕의 극치를 보여줬다.
전문가들은 "엘리엇과 같은 행동주의 펀드들이 주주가치를 지속적으로 상승시키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면서 "이벤트를 통해 주가를 단기적으로 부양시켜 차익을 챙기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지난 2000년부터 전 세계 23개국에서 이뤄진 1740건의 행동주의 펀드 개입은 대부분 주가를 지속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실패했다는 유럽기업지배구조연구소(ECGI)의 보고서는 좋은 근거다.
▲재계 "행동주의펀드는 기업경영 방해꾼"=재계에서는 행동주의펀드들이 헤지펀드의 특성상 수익이 절대적인 목적이기 때문에 절대 선의의 의도로 투자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들이 강조하는 주주행동주의는 기업이 미래 성장을 위해 활용해야 할 자원을 주주의 단기적 이익을 위해 사용해 기업의 장기적 성장을 희생한다는 것이다. 또 경영진 교체, 배당 확대, 자사주 매입 등 자신들의 이익만을 위한 무리한 요구로 기업의 미래성장을 방해한다는 것이 재계의 인식이다.
재계 한 관계자는 “이번 사태에서 엘리엇도 회사의 지속적 성장이나 발전은 고려하지 않고 경영권 분쟁 사안을 키워 주가를 끌어올린 뒤 차익을 올리려는 것이 목적”이라며 “여기에는 경영진을 위협하는 동시에 자신들의 보유 지분 가치를 크게 키우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밝혔다.
현재 삼성물산의 단일주주로서는 최대 지분(11.61%·의결권 11.22%)을 확보하고 있는 국민연금의 선택도 국익의 과점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재계의 판단이다.
▲공적연기금 국민연금, 국익 부합 목소리 커져=국민연금이 공적연기금의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서라도 국익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의견이다.
물론 주주들을 위해 수익을 올려야 하는 것이 연기금의 목표이지만 국익을 지키는 범위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중론이다. 국민의 세금으로 모아진 기금을 엘리엇과 같은 외국계 헤지펀드를 이롭게 하는데 사용해서는 안된다는 것이 재계의 입장이다.
특히 앞으로도 엘리엇과 같이 국내 기업의 경영에 간섭하려는 외국 투기자본들이 나타날 수 있는 상황에서 국민연금이 국내기업과 국민경제를 감안한 선택으로 확실한 메시지를 줘야 한다는 것이다.
오정근 건국대학교 금융IT학과 특임교수는 “과거 소버린·헤르메스·아이칸·론스타 등 외국 투기자본들은 소액주주의 이익보호를 내세웠지만 결국 막대한 이익을 챙겨 떠났다”면서 “소액주주 보호를 명분으로 투기자본의 힘을 빌리다가는 국부유출과 기업투자위축을 불러올 것”이라고 지적했다.
©(주) 데일리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