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용 영장 기각, 원정숙이 옳고 윤석열은 낡아
검찰의 구속만능주의 반드시 청산되어야 할 과제
사람들은 그날 밤 12시가 넘도록 결과를 초조히 기다리고 있었다.
0시 30분쯤 법원에서 영장이 발부됐다는 1보가 나오자 그녀의 구속을 갈망하던 쪽에서는 안도의 한숨과 환호성이 터져 나왔고, 그녀의 무죄를 주장하며 판사의 용단(?)에 기대를 걸고 있던 쪽에서는 실망과 분노의 함성이 폭발했다.
한국의 월드컵 축구 예선 중계방송 얘기가 아니다. 지난해 10월 24일, 이전 여름 1개월간 법무장관을 한 조국의 아내이자 동양대 교수로 딸의 부정입학, 사모펀드 불법투자 등의 혐의와 관련해 약 2개월간 검찰 수사를 받아 구속 영장이 청구된 정경심의 '운명' 결정의 날 얘기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렇게 단 하루 만에, 한 개인의 일생을 좌우할 구속이냐 불구속이냐를 결정하기 위해 10~15시간 마라톤 심사를 해야만 하며, 또 국민들은 1루 측과 3루 측으로 나뉘어 악다구니 응원전을 펼치는 야구 광팬들처럼 영장 발부면 승리(유죄) 또는 패배(무죄), 기각이면 그 반대의 결과라도 되는 양 손에 땀을 쥐고 지켜봐야 하는가?
4일 삼성전자 부회장 이재용의 경영권 승계 관련 불법행위 혐의로 검찰이 청구한 구속 영장이 법원에 의해 기각됐다는 보도를 보면서 검찰의 구속만능주의와 검찰개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구속의 근거는 고등학생들도 알다시피 도주와 증거인멸 우려이다. 정경심은 당시 수사 상황 보도로 볼 때 증거인멸 우려가 상당히 있었다. 수시로 말이 바뀌고 증거를 없애려던 정황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재용의 경우는 그러나 지난 1년 반 동안의 장기간 수사 과정에서 벌인 압수수색과 수십 명의 관련자 조사를 통해 검찰이 '환부(患部)가 나올 때까지' 증거를 수집했다. 그리고 그는 한국 경제 대표 기업의 총수로 도망갈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한국 검찰이 인신 구속에 집착하게 된 배경에는 여러 가지가 복합적으로 있으나 무엇보다 수갑을 차고 구치소로 수감되는 구속 이미지의 상징적 효과 때문일 것이다. 구속은 곧 유죄로 일반에 인식되며 수사 대상자에게 치명적으로 망신을 줄 수가 있다. 여기에서 검찰의 파워와 권위가 생성된다고 그들은 믿고 있고, 실제로 그렇게 돼온 것이 현실이다.
정치 보복도 이 같은 검찰의 무서운 구속 권력에 의해 자행될 수가 있다. 도주하려야 할 수가 없는 전직 대통령들이 무수히 구속되고 사법부의 수장인 전 대법원장도 재판을 받기도 전에 구치소에 수감된다. 구속이 이렇게 단죄 성격을 크게 갖다 보니 구속 영장 심사가 재판이 되어버린다. 검사는 판사 앞에서 유죄 주장을 하고 변호사들은 무죄 변론을 한다. 본 재판이 열리기도 전에 사전 재판이 열리는 것이다.
일반 시민들은 그래서 영장 심사 결과를 보고 그 사람의 유무죄를 이미 판단한다, 검사들은 아마 이 맛에 구속 영장을 치고 있다고 봐야 한다. 판사가 결정하기 전에 자신이 단죄하고 싶은 욕구라 할 수 있다. 정당의 대표인 심상정 같은 이마저 이재용 영장 기각이 마치 이재용 무죄 판결이라도 된다는 듯 '유전무죄(有錢無罪)' 운운하며 판사의 결정을 비판했다. '사법부의 수치' 어쩌고 하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다.
이재용과는 차원이 다른 경영인이지만, 미국의 빌 게이츠도 연방 검찰에 의해 수사를 받은 적이 있다. 그의 나이 43세 때인 1998년 반독점법(Sherman Antitrust Act) 위반으로 재판이 열린 유명한 미국(법무부) 대(對) 마이크로소프트(United States v. Microsoft) 사건에서 증언하는 그의 모습(유튜브로 지금도 볼 수 있다.)은 흰옷을 입고 수갑을 찬 채로 재판장 앞에 앉은 대한민국의 유명 인사들과는 전혀 다르다. 특유의 더벅머리에 넥타이를 맨 정장 차림으로 삐딱하게 앉아 자신의 입장을 편안하게 밝히고 있다. (미국 지방법원 판사는 마이크로소프트가 반독점법을 일부 위반했다고 판결, 회사를 운영 체계와 소프트웨어 부품 둘로 쪼개라고 명령했으나 연방항소법원에서 뒤집혀 빌 게이츠 측이 승소했다.)
우리도 이제 이래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이재용에 대한 구속 영장 신청은 윤석열 검찰총장이 재가한 것이다. 필자는 그가 개혁적이지도 반개혁이지도 않은, 다만 대가 센 한국 검사의 한 사람이라고 본다. 어떤 동기에 의해 조국 수사를 강행하면서 살아있는 권력과 충돌하고 그 권력이 그를 자꾸 건드리는 바람에 개혁과 정의의 이미지가 덧칠돼 왔을 뿐이다. 조국 사태 직전까지 그는 정권의 이른바 적폐 청산 작업 지시를 충실히 이행한 인물이었다. 청산해야 할 검찰의 '적폐' 중 하나는 바로 구속만능주의이다.
윤석열 총장이 이런 점에서 구시대적이라면 이번 이재용 영장을 기각한 영장전담 부장판사 원정숙은 많은 이들에게 희망과 신뢰를 준 신선한 판관이다. 그녀가 돈을 먹고, 혹은 바라고, 한국 제1기업 CEO를 풀어줬을 리는 없다. 유전무죄라니, 같은 여성 지도급 인사에게서 나온 이런 한심한 반응을 무색케 하도록 그녀의 '불구속 재판' 신념이 앞으로도 지속되고 다른 판사들에게도 확산되기를 기대해본다.
그리하여 시민들의 기부금과 정부의 보조금 유용 등의 의혹을 받고, 이미 다수 국민들 마음속에서 정죄가 끝난, 정의연 전 대표이자 지금은 국회의원이 된 윤미향 역시 구속 영장 신청이 아예 안 되거나 기각돼 자유로운 상태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으면 한다. 여직원 성추행으로 부산시장직을 사퇴하고 수사를 받고 있는 오거돈의 구속 영장이 기각된 것도 당연한 결과로 보도록 하자. 그가 어디로 도망갈 수 있겠는가?
윤미향이 수갑을 차고 구치소로 수감되는 모습을 봐야만 속이 시원할 사람들은, 미안하지만, 검찰과 함께 개혁되어야만 할 여론재판꾼들이다. 중요한 건 구속이 아니다. 입고 싶은 옷 입고, 꾸미고 싶은 대로 꾸민 얼굴을 하고 나와 국민과 재판관 앞에서 자신이 주장하고 해명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그 증언을 충분히 한 다음 판사가 결정해서 죄가 있다면 벌금이나 징역형을 받고, 그에 따른 책임을 지고 국회의원직에서 내려오는 것이 윤미향이 받아야 할 권리이고 기꺼이 해야 할 도리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야말로 검찰개혁이고 국민의식개혁이다.
글/정기수 자유기고가 (ksjung724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