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 중반 당 대표 후보의 대약진
여당의 당권은 운동권 꼰대 손에
보선 참패에도 교만 못 버린 친문
문재인 정권 및 그 주변의 정치세력은 여전히 ‘진보’로 자처한다. 그 반대편에 있는 세력은 자처하지 않아도 ‘보수’다. 지금은 당당히 ‘보수’라고 나서는 세력이 거의 없는데도 ‘보수정당’ ‘보수정치집단’ 등은 존재한다. 상대편에서 억지로 이름을 붙여 공격거리로 삼기 때문이다. 자기들은 ‘진보적’ ‘개혁적’ 정치세력이고 상대는 ‘보수적’ ‘수구적’ 정치세력으로 규정해야 편 가르기 전선이 분명해지고 악마 만들기도 수월해진다고 믿는 듯하다.
30대 중반 당 대표 후보의 대약진
그런데 최근 국민의힘 당권경쟁의 와중에서 엉뚱하게도 ‘진보’가 사라져 버렸다. 그 대표격인 더불어민주당이 “우리는 더 이상 진보가 아니다”라고 선언(문서로서가 아니라 행동으로)해 버린 결과다. 그간 정권 측은 적폐청산과 개혁의 기치를 치켜들고 ‘수구 보수’를 궤멸시켜버릴 듯이 기세를 올렸었다. ‘20년·50년 집권론’을 호기롭게 운위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지금은 제 풀에 주저앉고 마는 인상이다(‘석양에 홀로 서서 갈 곳 몰라 하노라’ 격이 된 건가).
쇄신·발전·희망 등과 동의어로서의 진보는 오히려 국민의힘 차지가 되어가는 분위기다. 지금 국민의힘 당 대표 선거전은 이준석·나경원·주호영·홍문표·조경태 5파전으로 진행되고 있다. 본선에 진출한 후보가 그렇다는 얘기이고 실제 경쟁은 ‘이-나 2자 대결’로 굳어지는 양상이다. 예선 성적이나 여론조사 결과만으로 보자면 이 후보의 독주체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후보를 정치 신인이라고 할 수는 없다. 2011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으로 정계에 입문한 이래 10년간 정치활동을 해 왔다. 낙선하긴 했지만 총선 2번, 재보선 1번 등 3차례 국회의원 선거 출마 경험도 있다. 새누리당 혁신위원장도 지냈다. ‘0선의 중진’이라는 표현이 어색하지 않을 정도의 경력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정치적으로 말하자면 ‘신진’인 것은 사실이다. 이른바 ‘전통·정통 보수정당’의 틀을 벗어난 행보를 보여 왔다는 점에서도 신진 정치인으로 분류하는 게 무난해 보인다. 게다가 나이가 36세다. 그 나이로 진보가 아닌 보수정당의 당 대표에 나섰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는 선두를 달리고 있다. 정치권은 물론이고 일반 국민에게도 충격적이기에 충분한 사태라고 하겠다.
여당의 당권은 운동권 꼰대 손에
예선에서 탈락하긴 했지만 김웅·김은혜 의원의 경우는 초선이다. 연령도 각각 51세와 50세로 지금까지의 예로 보자면 신진의 과감한 도전이었다고 할만하다. 더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처럼 격렬한 변화를 국민의힘이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문 정권 지지자들에 의해 ‘수구보수꼴통’으로 불려왔던 정당이! 거부감은커녕 당원들 대상의 여론조사에서 원내대표를 지낸 4선의 나 후보와 호각세(互角勢)를 보일 정도로 ‘열린 정당’의 면모를 과시했다.
반면에 ‘진보’를 자랑하던 민주당은 국회의원 5선 1명, 4선 2명이 대표 경선에서 겨뤄 최다선의 586 운동권(다른 후보도 운동권이긴 마찬가지이지만) 출신 후보가 승리했다. 초선이나 무선(無選)은 명함조차 디밀지 못했다. 이 당이 진보를 고집하면 ‘수구 진보’다. 아니면 ‘꼴통 진보’이든가. 변화를 두려워하고 회피하는 세력을 ‘진보’라고 하는 것은 말장난이거나 허위이다.
정세균 전 국무총리는 ‘이준석 바람’에 대해 ‘장유유서’를 들이대며 평가절하했다가 ‘꼰대’라는 비난에 직면했다. 자신은 언론이 왜곡한 것이라며 억울해 했다지만 경선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그걸 ‘국민의힘 측의 고민’으로 말한 것은 선의라고 할 수가 없다. 39세의 에드 밀리밴드를 당수로 선택했던 영국 노동당의 집권 실패 사례까지 들어가면서 말했으니 변명의 여지도 없다. 청년들의 일방적 지지를 자랑하던 민주당에서 장유유서라는 말이 나오다니!
정 전 총리 혼자만의 정서가 아니라는데 문제가 있다. 4·7재보선 후 민주당 초선 의원들이, 참패의 원인 중 하나로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문제를 지적한 ‘2030의원 입장문’을 냈다가 강성 당원들로부터 ‘초선 5적’으로 매도당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후 초선들의 목소리는 쑥 들어가 버렸다.
반면에 조 전 장관, 추미애 전 법무장관 등은 오히려 기세등등하다. “반성과 사과 따위는 내 사전에 없다”는 식이다. 특히 조 전 장관은 회고록까지 출간하면서 열성 지지자들을 결집시키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당의 대선주자들까지 조 전 장관 지지자들의 위세에 눌린 듯, “가슴이 아프고 미안하다”(이낙연) “가슴이 아리다”(정세균) “조국의 시련은 개인사가 아니다”(추미애) 등의 추임새를 넣기에 열심이다. 기득권 혁파가 아니라 기득권 공고화가 민주당의 당론인가?
보선 참패에도 교만 못 버린 친문
이들이 도그마에 빠져 있는데 비해 국민의힘은 인식과 의식의 변화를 행동으로 실증하고 있다. 김종인 전 비상대책위원장이 강행한 측면이 있지만 어쨌든 당의 리더가 광주 5‧18묘역에 가서 무릎을 꿇었다. 박근혜·이명박 전 대통령의 ‘과오’에 대해 대국민사과문을 내기도 했다. 그 이전까지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김 위원장의 결단을, 일부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당 차원에서 수용했다는 점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물론 앙앙불락의 심정을 가진 당원들이 많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 소속 의원들과 당원들이 ‘사과’를 무산시키지 않았던 것은 진정한 변화와 쇄신만이 민심을 되돌릴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고 본다.
민주당과 국민의힘, 국민의힘과 민주당이 보이고 있는 지금의 인식·의식·입장·행동양식의 반전은 정치사적 대사건이라 할 만하다. 그렇지만 이는 진보가 보수화하고 보수가 진보화 하는 식의 변화가 아니다. 불변의 진보와 보수는 없다는 걸 확인시켜준 기회가 됐다고 보는 게 옳다. 다만 진보를 자처한 세력이 그것을 집단적 상징어로 삼았을 뿐이다. 그러면서 ‘보수’에 비하적 의미를 덧칠하고 그쪽으로 경쟁 집단을 몰아붙였다. 종전까지는 그 재미를 톡톡히 봤다. 그러나 그 시절을 가고 말았다.
어느 날 갑자기 닥친 현상이 아니다. 큰 변화는 오랜 기간에 걸친 전조를 나타낸다. 그걸 제대로 해독하는 측은 승리하고 자만에 빠져 아전인수식으로 오독하는 측은 패망한다. 문 정권의 위험신호는 집권 초부터 지속적으로 울렸다. 그런데도 정권 실세들은 이를 무시했다. 친문이 주도하는 지지 세력이 교조주의적 집단으로 경직된 탓이었다. 이런 상태라면 이성적‧합리적 사고는 배척된다. 정서적 일체화를 강요하고 ‘우리는 하나다’라는 신화를 만들어 낸다. 그 귀착점이 눈에 보일 정도의 거리 안에 들어온 느낌이다.
글/이진곤 언론인·전 국민일보 주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