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춰선 불타바강의 보헤미안 랩소디
<유럽에 미치다⑤-체코 프라하1>광장에서 민주주의를 외치다
1969년 1월 칼바람이 부는 바츨라프 광장 기마상 앞. 22세 얀 팔라치는 멀리 프라하성을 응시한다. 카를 대학교에서 역사와 정치경제학을 전공하는 대학생인 얀 팔라치는 지난 해 알렉산드르 두브체크가 ‘사람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개혁노선을 펼치던 ‘프라하의 봄’을 생각했다. 불과 7개월 만에 소련의 탱크에 수백명이 목숨을 잃으며 막을 내린 ‘프라하의 봄’이었다. 하지만 얀 팔라치의 가슴엔 더 크고 찬란한 혁명의 불이 당겨지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한 달 후인 1969년 2월, 같은 대학교 후배인 20세의 얀 자익도 얀 팔라치가 온몸에 불을 당겼던 그 자리에 다시 섰다. 국가가 위기에 처하면 중부 보헤미아 블라비크산에서 내려와 조국을 구한다는 바츨라프 왕의 웅대한 기마상 앞에서 그 또한 ‘프라하의 봄’을 생각하고, 체코의 민주주의를 외치며 온몸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 그들의 그 숭고한 죽음을 목격한 이가 있었다. 후일 체코의 대통령이 되는 극작가이자 정치가인 바츨라프 하벨. 그는 얀 팔라치와 얀 자익이 온몸에 불을 당겨 체코의 민주주의를 외친 지 정확히 20년 후인 1989년, 그 두 젊은이의 거룩한 죽음의 터에서 소련의 탱크와 장갑차를 물리치고 체코의 민주주의를 완성했다.
프라하 여행의 출발점을 굳이 바츨라프 광장으로 잡은 것은 체코가 처절하고 지난한 고통 속에서도 결국 아름다운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서기 7세기 초 사모왕국으로 시작되는 체코의 역사는 9세기 모라비아 왕국을 거쳐 10세기 초 보헤미아 왕국 때 프라하를 수도로 삼고 번창하기 시작한다. 특히 1347년 집권한 카를 4세가 1355년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되면서 체코는 유럽의 중심 국가가 된다. 그러나 체코는 1526년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왕가로 편입이 되면서 모국어도 체코어 대신 독일어가 강요된다. 1918년 겨우 오스트리아 지배에서 벗어나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을 선포했지만 그것도 겨우 20년. 세계 제2차 대전 발발과 함께 나치 독일의 지배에 들어간다. 1945년 해방됐지만 사실상 소련의 지배에 놓이게 된다. 그리고 1968년 프라하의 봄과 1989년 벨벳혁명을 거쳐 겨우 ‘진짜’ 독립된 민주주의 국가가 된 것이다.
그래서 바츨라프 광장은 체코 민주화의 상징이다. 1918년 체코슬로브키아 공화국 선포도, 나치에 저항하던 독립운동도, ‘프라하의 봄’과 벨벳혁명도 바로 이 바츨라프 광장에서 이뤄졌다. 지금은 프라하에서 가장 비싸고 활기찬 공간이다. 온갖 유명한 패션 브랜드를 비롯해 크고 작은 상점들과 백화점, 은행, 호텔들이 늘어서 있다. 그래서 프라하를 찾은 여행객들은 물론 프라하 젊은이들로 늘 북적이는 곳이다.
프라하를 남북으로 가르며 독일 엘베강까지 이르는 불타바강은 프라하의 젖줄이다. 그리고 이 강 위에 프라하를 더욱 더 반짝반짝 빛나게 하는 존재가 있다. 바로 카를교다.
해가 막 뜰 무렵 카를교는 늦은 밤까지 다리 위를 가득 메운 인생들로 앓았던 몸살을 겨우 추스리고 있다. 간간히 오가는 사람들은 그다지 바쁘지 않게 하루를 준비하고, 이 시간이 아니면 담을 수 없는 그림 때문에 굳이 새벽 시간에 다리 위에서 웨딩 사진을 찍는 부지런한 청춘들도 있다.
카를교는 체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으로 추앙받는 카를 4세의 이름을 딴 석조 다리다. 원래 목조다리가 있던 자리에 카를 4세가 아름다운 고딕 양식의 돌다리를 만들었다. 폭 10m, 길이 520m의 보행자 전용 다리인 카를교는 다리 양쪽 난간에 모두 30명의 보헤미아 성인의 동상이 조각돼 그 아름다움을 더한다.
그런데 이 다리에는 희한한 수열의 비밀이 있다. 135797531. 1357년 7월 9일 5시 31분을 뜻한다. 카를 4세가 이 다리의 초석을 놓은 날짜를 시간과 분까지 표시한 것이다. 7과 9의 순서가 바뀐 것은, 유럽에서는 영국을 제외하고 날짜가 달보다 앞에 표기되기 때문이다.
카를교는 늘 사람들로 복잡하다. 다리 양 옆으로는 초상화를 그려주는 화가, 불타바강을 배경으로 한 풍경화를 그리는 화가를 비롯해 여러 가지 기념품을 파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10년 이상 한 자리에서 공연을 하는 시니어 밴드도 있고, 자비의 손길을 기다리는 시각장애인도 늘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중세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듯한 프라하와는 어울리지 않는 곳이 존 레논 벽이다. 프라하 성 쪽으로 카를교를 건너 왼쪽 캄파 공원을 향해 가다보면 벨코프르제로브스케 광장이 나오는데, 그곳에 그래피티인지 그냥 낙서인지 모를 것들로 가득한 요란한 벽이 존 레논 벽이다. 누가 시작한 것인지는 모른다. 어느 날 아무도 모르게 이 벽에 존 레논의 얼굴이 그려지고 존 레넌의 대표곡인 ‘이매진’ 가사가 적히기 시작했다고 한다. 대략 존 레논이 1980년 12월 8일 밤 11시경 뉴욕 맨해튼에 있는 자신의 집 앞에서 마크 데이비드 채프먼이 쏜 총에 맞아 사망한 후 그 얼마 쯤 후 이 벽에 존 레논의 그림이 그려진 것으로 추정한다. 그 이후 이 벽엔 프라하 시민 뿐 아니라 전세계에서 평화를 갈망하는 젊은이들이 앞다퉈 낙서를 하고 있다. 이곳의 낙서는 반드시 존 레논과 연관이 있거나, 아니면 세계 평화, 민주주의, 자유 등의 보편적 가치를 내용으로 하고 있다.
프라하 여행의 백미는 프라하성이다. 프라하 시내를 내려다보는 언덕에 위치한 프라하성은 9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무려 700여 년 동안 다듬어져 왔다. 로마네스크 양식에 고딕 양식이 더해지는가 하면 다시 르네상스 양식까지 더해져서 지금에 이르는데, 성 안에는 왕궁과 성 비투스 성당, 성 이르지 교회, 황금소로 등이 모여 여행자들의 발걸음을 느리게 한다.
프라하성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성 비투스 성당. 첨탑까지의 높이가 124m에 이르는 탓에 프라하 어디서라도 한 눈에 보이는 곳이다. 10세기 현재 자리에 원형 성당으로 처음 지어진 후 11세기에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재건축 됐다가 카를 4세 때인 1344년 웅장한 고딕 양식으로 다시 모습을 바꿨다. 그러나 성 비투스 성당이 완공된 것은 1929년이라고 하니 무려 1000년에 걸쳐 지어진 건축물인 셈이다.
프라하성 안에는 천재 소설가 프란츠 카프카의 흔적도 있다. 낮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골목 황금소로. 원래 프라하성의 경비병 숙소였던 곳이다. 그런데 16세기 후반에 왕이 고용한 금 세공사들과 연금술사들이 모여 살게 되면서 황금소로라고 불렸다. 이곳 22번지에서 카프카는 1916년 11월부터 1917년 5월까지 머무르며 글을 썼다. 프라하 성을 나와 카를교 쪽으로 가다보면 카프카 박물관이 나온다. 위대한 문학가의 박물관이라고 하기엔 소박해 보이는 곳이지만 41년을 볼꽃처럼 살다 간 비운의 삶이 그대로 녹아 있는 공간이다.
성 비투스 성당을 통해 느껴지는 체코 건축미학은 프라하 시내 전체에 골고루 퍼져 있다. 프라하를 ‘유럽 중세 건축의 보고’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사실 거기에는 그다지 유쾌하지 않은 사연도 숨어 있다.
우리는 흔히 세계 제2차 대전이 나치의 폴란드 바르샤바 침공으로 시작된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실은 나치는 바르샤바보다 먼저 프라하를 침공했다. 다만 나치의 침공에 극렬히 저항한 폴란드인들과는 달리 체코인들은 나치의 침공을 아무런 저항도 없이 받아들였다. 이유는 프라하의 그 위대한 건축물들이 파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도시의 80%가 파괴된 바르샤바와는 달리 프라하는 거의 전쟁의 상흔을 입지 않았다. 위대한 중세의 건축물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일설에는 젊은 시절 프라하의 아름다움에 넋을 잃은 히틀러가 은퇴 후 프라하에서 노년을 보내기 위해 폭격을 금지시켰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진위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 참담한 전쟁 속에서도 프라하가 중세의 건축물들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어느 정도의 치욕의 대가였던 듯 하다.
그렇듯 위대한 프라하의 중세 건축물들은 구시청 광장을 중심으로 사방에 널려있다. 킨스키 궁전이나 틴 성모성당, 성 미쿨라시 성당 등 유명한 건축물이 아니라도 구시청 광장 주변의 건축물 하나하나가 중세 건축양식의 박물관과도 같은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다. 그 주변의 건물 중 2~300년 된 건물들은 새 건물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할 정도니.
구시청 광장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오를로이 천문시계. 구시청 건물의 한 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천문시계는, 구시청 건물이 프라하 시내 중 유일하게 나치의 폭격으로 파괴됐지만 용케 온전히 그 모습을 지킬 수 있었다.
이 천문시계는 15세기에 시계 기술자인 미쿨라스라는 사람이 만들었다. 그런데 이 시계의 아름다움이 다른 나라와 도시로도 전해지면서 미쿨라스는 똑같은 시계를 만들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하지만 프라하 시청 측에서는 그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미쿨라스의 눈을 멀게 만들었다. 앞을 못보게 된 미쿨라스는 시계를 한번만 만져볼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을 했고, 그가 시계를 만지자 시계는 갑자기 서 버린 후 400년 동안을 멈추었다고 한다. 그리고 1860년에 와서야 이 시계가 다시 작동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천문시계는 위쪽은 칼렌다륨, 그리고 아래쪽은 플라네타륨이라고 부른다. 칼렌다륨은 천동설의 원리에 따라 해와 달과 천체의 움직임을 묘사하여 1년에 한 바퀴를 돌면서 연, 월, 일, 시간을 나타내고, 플라네타륨은 12개의 계절별로 장면을 묘사하여 그 당시의 보헤미아 지방의 농경생활 모습을 보여준다.
매시 정각이 되면 이 천문시계는 해골모양의 인형이 밧줄을 잡아당겨 모래시계를 뒤집으면 시계 위쪽에 있는 두 개의 창문이 열리면서 예수님과 열두제자가 차례차례 지나간다. 이때 해골 옆에 있는 아랍인과 반대편에 있는 지갑을 든 유태인, 거울을 든 인형들이 춤을 추는 듯한 동작을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황금색 수탉이 홰를 친다. 이 모습을 보기 위해 프라하의 여행자들은 매 시간 이 천문시계 앞에 모여 고개를 쳐들고 있는 것도 볼만한 장면이다.
해가 지고 불타바 강에 어둠이 드리워지면 프라하는 찬란하게 되살아난다. 체코가 지나온 그 길고 고단한 역사를 보상받기라도 하려는 듯 민주화 이후 프라하는 밤에 더 화려한 옷으로 갈아입는다.
프라하의 밤은 마치 내일이 오지 않기를 바라는 이별을 앞둔 연인 같다. 깊은 사랑에서 빠져 나오지 않으려는 듯 시간을 움켜쥐고 서로를 부둥켜안은 팔에서 힘을 풀지 않는다. 그곳이 삶인 사람이든, 새로운 추억을 쫓아 흘러들어온 사람이든, 이미 프라하의 깊고 화려한 밤에서 그 누구도 헤어 나오려 하지 않는 듯하다.
그래서일까 유럽 대부분의 도시가 짧고 단순한 밤을 지니고 있지만 프라하의 밤 그 끝을 알 수 없는 긴 소설처럼 한없이 이어지고 있다. 교교히 흐르며 프라하를 충분히 적셔주는, 그 흥건한 흥분으로 밤새 몸서리쳐지게 하는 불타바강의 열정이 프라하를 내내 휘감고 있는 것이다.
프라하의 밤은 전염성 강한 바이러스처럼 여행자의 심장을 부여잡는다. 마치 노스텔지어처럼 열병을 앓게 하고, 이제 시작하면서도 이별의 고통을 느끼게 한다. 결코 놓아주지 않겠다고 고집부리고, 두 팔로 죽어라 부둥켜안은 채 이 밤을 놓아주지 않는다고 고함친다. 프라하의 밤은 그래서 낮보다 더 치명적인 중독 증세를 보이나보다.
시간이 멈춰선 중세의 광장에서 사랑의 노래를 부른다.
글·사진 이석원 여행작가 /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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