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의 부활? 문화에서 복고 열풍은 없다
<김헌식의 문화 꼬기>퇴행도 유행도 아닌 언제나 존재하는 것
요즘 웬만한 매체에는 오르내리는 '복고 퇴행인가, 유행'이라는 물음만큼 허망한 것도 없다. 복고는 퇴행도 아니고, 유행도 아니기 때문이다. 과거를 다루는 대중문화콘텐츠는 항상 있어 왔다. 과거의 일을 소재로 사용한다고 복고 작품이라고 볼 수는 없다. 예컨대, 영화에서는 언제나 과거의 일을 다루기 마련이다. 이는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를 다루지 않았던 적은 한 번도 없다. 예전에 활동했던 가수들이 텔레비전에 등장한다고해서 이를 복고 현상이라고 규정하는 것도 정확하지 않다. 지난 10년동안 복고라는 단어가 매체에 등장하지 않은 때는 거의 없다.
또한 이는 '가요무대'같은 방송 프로그램이나 '콘서트 7080'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단적으로 드러난다. 복고 즉 과거에 활동했던 가수들이 등장하는 현상은 별다르게 특이하지도 않다. 다만, 최근에는 90년대 음악이 좀더 적극 부각되고 있다. 이에 대해서 여러가지 배경과 이유가 분석되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과잉담론인 경우가 많다. 뭔가 대단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다뤄지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90년대 음악들이 선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90년대 가요나 가수들이 많이 선을 보이는 것은 그 세대들이 생애주기에 따라 새로운 음악적 트렌드에 덜 적응하려는 움직임이 강해지기 때문이다. 조금 있으면, 2000년대 음악이 등장할 것이며, 이후에는 다시 2010년대 음악이 연이어 등장할 것이다. 따라서 복고는 당연히 등장하는 문화현상인 것이다. 각 세대의 이동에 따라 그 시간적 배경이 조금씩 미래에 가까워질 뿐이다.
복고는 더구나 많은 경우에 방송미디어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 일상에서 자발적으로 형성되는 것도 아니다. 복고가 자발적으로 재창조되는 경우가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즉, 복고 자체는 퇴행도 유행도 아니지만, 그것을 어떻게 재창작하는가가 문화적 진화를 위해서는 바람직할 것이다. 그것에 따라 당연히 지속되는가 아니면 한순간에 바람처럼 흘러가는지가 결정될 것이다.
기성세대들일수록 방송이나 신문에 더 친숙하다. 새로운 세대일수록 텔레비전보다는 인터넷이나 디지털 모바일에 대한 선호가 높아진다. 과거 문화에 대한 과잉 분석은 방송과 매체의 집중도를 높이는 역할을 한다. 이때문에 항상 방송이나 신문에서는 복고에 무엇인가 거대한 함의가 있는 것으로 강조하기 쉽다. 그것도 요즘 젊은 세대들이 관심을 갖고 있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현시대 젊은이들은 대부분의 경우에는 과거 문화에 별로 관심이 없다. 관심을 보이는 경우는 지금의 문화코드와 비슷할 경우에만 해당한다. 마음을 흔드는 작품을 만날 때 잠시 뿐이며 그것은 꼭 복고이기 때문이 아니라 보편적인 문화 감수성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고 우울하게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지금의 기성세대들도 과거 젊은 시절에는 마찬가지 심리 상태였다. 기성세대문화 보다는 자신들의 문화를 우선했다. 간혹 리메이크된 작품들을 소비할 뿐이었다. 리메이크는 과거와 문화와 현재의 문화 감수성을 연결해주는 가교 역할을 하는 면이 충분히 있다. 지금의 젊은 세대들도 시간이 지나면 자신의 문화적 코드와 취향을 꺼내들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문화를 부각시키면서 그때의 젊은 세대 문화를 낮춰 볼 것이다. 그것은 세대 문화의 반복되는 순환 궤도이다.
그렇기 때문에 90년대의 문화가 거대한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의미부여하는 것은 과잉해석이기도 하지만, 자칫 문화적 편견을 강화하는 행태일 수도 있다. 현재의 문화를 낮춰 볼수 있으니 말이다. 현재 아이돌 문화나 디지털 문화가 부정적인 점도 있지만 장점이 있기 때문에 생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화에서 우선순위나 서열은 있을 수 없다. 다만, 그것을 선호하는 사람들의 규모가 다를 뿐이다. 그 규모가 다르다고하여 옳고 그름의 기준이 확립되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복고는 퇴행도 유행도 아니고,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다만, 주류에서 더 이상 볼 수 없어서 거꾸로 희소성이 증가할 타이밍에 좀 더 적극적으로 부각될 뿐이다. 그러나 90년대 문화에 대한 부각에 거대한 사회적, 문화적 의미가 있는 것처럼 오버하지는 않아야겠다. 오버와 과잉, 그렇게 되면 속고 속이고 실패의 쓴 맛을 보는 사람들의 피눈물은 더욱 증가할 수 밖에 없다.
글/김헌식 대중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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