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레기’ 말 들어도 싼 진영의 포로가 된 기자들 모습
‘범죄’로 용맹 떨친 이들 중 존경받는 언론인 없어
필자가 1980년대 중반 수습기자(修習記者)로 뛰던 시절 이야기다.
서울 관악구에서 아침 출근, 등굣길에 버스 개문발차(開門發車) 사고로 한 고교생이 숨지는 사고가 일어났다. 개문발차란 차 문을 닫지 않은 채 출발하는, 만원 버스 시대에 늘 사회문제가 됐던 버스 운전자들의 안전 불감증 운행 행위였다.
시경 캡(일선 경찰서 출입 기자들을 지휘하는 선임 기자)에게 보고하자 ‘빨리 사진부터 구해!’ 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안타까운 교통사고 기사에 웬 사망자 사진이 필요하나?’라는 의문과 불만도 잠시, 타사 기자에게 선수를 뺏기지 않기 위해 택시를 타고 총알같이 희생자 집에 당도했다. 군대식 도제(徒弟) 집단에서 선수를 뺏기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는 독자들 상상에 맡긴다.
그러나 도착해 보니 그 집은 이미 초토화된 뒤였다. 타사 동료 기자들이 책상 등을 뒤져 다 가져가 버린 것이다. “어떤 기자는 앨범 하나를 통째로 들고 갔다. 그 앨범 꼭 돌려받아야 하는데….”라고 숨진 학생 누나가 울먹이고 있었다. ‘사회의 목탁(木鐸)’이라는 언론이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어 망연자실해 하는 집에 들어가 추가 만행을 이렇듯 처참하게 저지른 것이다.
행동이 느리고 생각이 많은 필자는 이런 취재 관행이 싫었고, 그래서 번번이 경쟁에서 졌다. 기자 사회에서 쓰는 말로 ‘물 먹는’ 일이 다반사였던, 일종의 루저였다. 당시 사회부 기자 중에는 취재원들에게 무례하거나 행패 부리는 건 물론 사칭(詐稱, 이름, 직업, 나이, 주소 따위를 거짓으로 속여 이름)도 서슴지 않는 이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사회부 초년 기자 시절 5공 치하에서 큰 비리 사건이 났을 때 부장 밑에서 데스크 일을 맡고 있던 차장 기자 한 사람이 자신을 검사라고 하면서 한 의혹 당사자를 전화로 1시간 이상 ‘심문’ 취재하는 걸 옆에서 본 적이 있다. 우리 졸병 기자들은 그의 그런 무용담 얘기하면서 비판보다는 감탄, 경외의 마음을 품었던 게 사실이다.
독재정권 하에서 정의를 위해 행하는 불법에 관대한 사회 분위기 탓도 있긴 했다. 언론사들은 이런 행위를 장려하는 쪽이었다. 특종에 눈이 멀어 직업윤리는 팽개친 것이다. 사실, 그때는 직업윤리라는 게 제대로 만들어져 있지도 않았다. 공익보다는 개인과 회사와 진영의 이익을 위한, 권력을 가진 자들의 사적 동기가 낳은 구습이다.
세월이 40년 가까이 흐르고, 나라 경제가 선진국에 이르렀으며, 전 국민이 ‘기자’가 된 SNS 시대, 2021년 여름에 아직도 경찰을 사칭한 취재 사건이 일어났다고 하니 참으로 놀랍고 부끄럽다. 야권 유력 대권 주자 윤석열 부인의 박사학위 논문이 엉터리(표절)임을 추적, 이를 폭로하기 위해 MBC 기자 두 명이 그녀의 지도교수가 살았던 집을 찾아 현 거주자에게 경찰이라고 거짓말을 하며 이것저것 캐물었다.
그 기자 중 한 명이 전 앵커였고 다른 한 명은 영상취재 PD였다고 하는 사실이 이 사건의 ‘범죄성’을 더해 주는 단서다. 앵커급 기자와 PD가 경기도 파주까지 출동했다면, 이것은 상당한 기획과 목적하에 이뤄졌다고 보는 것이 언론사 취재 시스템상 상식이다. 그들은 김대업 보도와 같은 특집 기획을 염두에 두고 취재를 시작했을 가능성이 높다. 진영의 포로가 된 기자들 모습이다.
윤석열 대선캠프는 해당 기자 2명과 책임자 1명을 서울 서초경찰서에 형사 고발했다. 강요죄와 공무원자격사칭죄를 걸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주장했다.
“일반 시민을 속이고 겁주는 방법으로 불법 취재를 한 중대 범죄의 전모를 규명하고 재발을 막아야 한다. 불법 취재까지 동원한 정치적 편향성도 드러났으므로, 현장 기자들의 단독행위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MBC는 검사와의 친분을 과시해 노무현재단 이사장 유시민에 대한 취재 활동을 벌여 강요미수죄로 구속기소 된 채널A 기자의 이른바 ‘검언유착’ 사건을 처음 폭로한 언론사다. 부메랑이 되는, 그 방송 기자들의 이번 경찰 사칭 사건은 논란도 없고 회사에서 사과 방송까지 한, 미수가 아닌 ‘범죄 완료’ 행위다.
지난 4.7 보궐선거 당시 생태탕 의혹을 집중적으로 보도한 KBS는 야권 후보 오세훈에게 치명상을 가하려고 했으나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고 체면만 구겼다. 그러고도 수신료를 인상하겠다고 하니, 아마도 KBS 기자들은 만나는 사람마다 ‘무슨 낯으로 시청료를 올리나?’라는 핀잔을, 두 귀로는 아니더라도 마음으로 듣고 있을 것이다.
자기네 진영 후보는 편들거나 변호하고, 상대 후보에 대해서는 없는 의혹도 들춰내 흠집을 내려는 편향 보도도 모자라 수사관을 사칭하는 범죄적 방법을 동원하는 기자들은 ‘기레기(기자+쓰레기)’란 말을 들어도 싸다. 진보좌파들이 보수 언론에 적대적, 경멸적으로 쓰던 이 말을 이제 진보 매체들이 덮어쓰게 됐다.
참고로, 서두에 소개한 필자의 초년 기자 시절 취재원들을 상대로 무례와 사칭으로 용맹을 떨치던 기자 중에 훗날 언론인으로서 존경받는 이름을 남기고 있는 사람은 전무하다. 후배 기자들은 이들의 말로(末路)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직업윤리도 투철하면서 사회의 목탁 역할에 충실한 기자는 그런 범죄 행위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청와대 대변인직에서 물러난 한겨레신문 출신 ‘흑석 거사’ 김의겸이 최근 ‘경찰 사칭은 과거에 흔한 일’이라며 MBC 기자들을 옹호했다. 그 흔한 사칭을, ‘용기가 없어’ 한 번도 해보지 못한 필자와 같은 ‘루저’ 기자들이 듣기에 기가 막히는, 모욕적인 일반화다.
김의겸도 존경받는 이름을 남기고 있지 않은 전직 언론인 중 한 명이다.
글/정기수 자유기고가 (ksjung724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