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 만해?]지옥보다 더한 '헬조선'의 민낯 '재심'
약촌오거리 살인사건 영화화
정우· 강하늘· 김해숙 주연
약촌오거리 사건 영화화 '재심' 리뷰
배우 정우· 강하늘· 김해숙 주연
"변호사는 기본적 인권을 옹호하고, 사회 정의를 실현함을 사명으로 한다."(변호사법 제1조 1항)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재심'은 변호사 준영(정우)의 입을 빌려 메시지를 던진다. "누구를 위해 법은 존재하는가?", "모든 인권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사법 시스템은 잘 돌아가고 있는가?"
'재심'은 목격자가 살인범으로 뒤바뀐 '익산 약촌오거리 살인사건'을 스크린에 옮겼다. 돈 없고 '빽' 없는 변호사 준영과 살인 누명을 쓰고 10년을 감옥에서 보낸 현우(강하늘)가 진실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과정을 담았다. '또 하나의 약속'(2013)의 기획·연출·각본을 맡은 김태윤 감독이 메가폰을 들었다.
현우의 실제 주인공인 최모(32)씨는 지난해 11월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받았다.
최씨는 15살이던 2000년 8월 10일 오전 2시 7분께 전북 익산시 약촌오거리에서 오토바이를 몰고 가다 택시기사 유모(당시 42)씨와 시비 끝에 유씨를 흉기로 찔러 살해한 혐의로 기소됐다. 이 사건의 최초 목격자였던 최씨는 참고인 조사에서 "현장에서 남자 2명이 뛰어가는 모습을 봤다"고 진술했으나 경찰은 그를 범인으로 몰았다. 최초 목격자가 갑자기 살인자로 바뀐 것이다.
최씨는 살인과 도로교통법 위반(무면허) 혐의로 구속기소됐으며 2001년 2월 1심 재판부인 전주지법 군산지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았다. 이후 징역 10년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다 2010년 출소했다.
세상에 나온 최씨는 "경찰의 강압수사 때문에 허위 자백했다"며 재심을 청구한 끝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이후 16년 만에 검찰과 경찰의 공식 사과를 받았으나 억울한 16년은 그 어떤 것으로도 보상받지 못했다. 진범으로 지목된 30대 남성 김모씨는 구속기소된 상태다.
'재심'이 영화에 돌입하던 당시엔 사건의 진범이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이 사건을 취재하던 한 기자의 제안으로 영화화가 결정됐다. 제작진과 김 감독은 단순 사실 과정을 조명하는 다큐멘터리 스타일의 영화가 아닌, 영화적 재미와 상상력을 더한 이야기를 선택했다. 실존 인물뿐만 아니라 허구 인물도 추가했다.
영화는 현우가 사건을 목격한 순간부터 시작된다. 다방에서 일하던 현우(강하늘)는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짓밟아버린 택시기사 살인 사건을 목격한다. 하지만 경찰은 현우의 오토바이에 있는 칼을 증거로 들이대며 현우를 살인범으로 몬다. 현우는 경찰의 강압적인 수사에 거짓 자백을 하고 누명을 쓴 채 10년을 감옥에서 보낸다.
10년을 복역하고 나온 현우에게 근로복지공단은 1억4000만원의 구상권 청구소송을 제기한다. 피해자인 택시기사 유가족에게 지급된 4000만원에 1억원의 이자를 붙여 구상권을 행사한 것. 전과자라는 낙인이 박힌 현우에겐 엎친 데 덮친 격이다.
'지잡대' 출신 변호사 준영은 거대 로펌 대표의 환심을 사기 위해 무료 변론 봉사를 펼치던 중 현우의 사건을 알게 된다. 명예와 유명세를 얻는 데 좋은 기회라는 생각에 변호를 맏게 된 준영은 경찰, 검찰 수사가 잘못됐다는 걸 알아차린다.
돈만 추구하던 준영은 '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현우의 말을 믿고, 돈이 아닌 인권과 사회 정의를 외치며 고군분투한다. 세상에 담을 쌓고 지내던 현우 역시 준영을 믿고 희망을 보기 시작한다.
영화는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한 소년의 울부짖음, 그런 소년의 외침을 외면하는 씁쓸한 현실, 무너진 사법 시스템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법이라는 것이 사람 보호할라고 만든 것이여?", "가진 놈이 자기 보호할라고 만든 게 법", "확률 없는 재심이 낫냐, 확실한 돈이 낫냐" 등 현실을 반영한 대사들이 관객의 가슴에 '콕' 박힌다.
"'헬조선'보다 지옥이 낫다. 지옥에선 죄지은 만큼 벌 받잖아"라는 대사는 지금의 대한민국 민낯을 들춰낸다. 돈 있고, 힘 있고, 권력 있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서든 법망을 빠져나가고,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만 법과 사회에서 외면받는 한국의 현실이 그렇다.
영화를 지배하는 정서는 억울함, 답답함, 절망이다. "난 안 죽였어"라고 아무리 외쳐 받자 밑바닥 인생을 사는 현우에게 귀 기울이는 사람은 없다. 분통 터지는 일에 책임지는 사람 역시 없다.
사방이 꽉 막힌 절망 속에서도 빛은 있다. 영화와 실화의 결말은 희망적이다. 현우를 믿는 한 명의 변호사 준영을 통해 아무리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희망은 있다고, 그 희망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사람들의 것이라는 깨달음을 길어 올린다. 힘들고 지친 상황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서로가 서로에게 버팀목이 돼주는 것이라고 영화는 강조한다.
실화를 최대한 담담하게 보여주려고 한 흔적도 엿보인다. 눈물과 감동을 억지로 쥐어짜는 듯한 시도가 없어 여운이 깊다.
극 말미 준영이 현우에게 "널 살인범으로 만든 건 우리"라며 오열하는 장면과 준영이 "본 법정에 선 이유는 검찰과 경찰, 법조인에게 사과의 기회를 주기 위해서입니다"라고 말하는 장면이 영화의 백미다.
다만, 실화 소재를 한 영화인 터라 온갖 양념이 뿌려진 큰 대작에 익숙한 관객들은 심심하게 느낄 수도 있겠다.
배우들의 연기엔 엄지가 올라간다. 정우, 강하늘의 앙상블이 뛰어나다. 섬세한 감정 표현이 관건인 이 영화에서 두 배우는 캐릭터를 세밀하게 빚어냈다. 인물에 오롯이 녹아든 느낌이다. 시각장애인으로 분한 김해숙의 연기력은 말할 것도 없다. 이경영, 이동휘 등 조연 배우들도 흠잡을 데 없는 연기를 펼쳤다.
정우는 영화를 선택한 이유에 대해 "이야기의 힘을 느꼈다"며 "사건을 실제로 겪지 않았는데도 (인물에) 공감했다"고 전했다.
캐릭터와 관련해선 "소시민적인 준영이의 모습이 매력적이었다"며 "그간 선보이지 않았던 신선한 변호사라고 생각한다. '한 번 더' 촬영을 자주 외칠 만큼 이번 영화는 욕심이 났다"고 강조했다.
강하늘은 "약촌오거리 사건을 TV에서 접하고 분노했던 시청자 중 한 명이었다"면서 "시나리오가 내게 왔을 때 긍정적인 마음으로 끝까지 읽었다. 이야기의 힘을 믿고 작품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김 감독은 "전작이 너무 힘들어서 상업 대중영화를 하고 싶었다"면서 "시사프로그램을 보다가 너무 사연이 기가 막혀 용기를 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 영화를 사회고발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건 언론이 해야 하는 역할이다. 우리는 휴머니즘을 강조하려고 노력했다"고 덧붙였다.
2월 16일 개봉. 119분. 15세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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